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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西湖亭의 20대初 軍生活 日記>

문화西湖亭/이도희 (edohy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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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10 11:03

<나의 20대初 軍生活 日記>

번뇌와 선택의 기간(나이 24-25세 군생활일기)

(1966.9.2.-1967.5.7)

나의20대울타리속의방황/반항과선택의기간(군생활일기에서:1966.9.2.-1967.5.7.):

그 기간 의 내 일기를 Wordprocessor 로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보았다. 그 당시 내 계급은 임관한지 얼마 안된 포병소위를 거처 중위가 되었다. 서두부터 이렇게 적어 내려갔다.

“ 아 래 ”

1. 나는 여기에 나의 참회, 나의 번민 그리고 나의 희망에 대한 반항 그리고 때때로 나의 독백을 적는다.

2. 국가도 가정같이 사회도 가정같이 세계도 가정같이 내 마을도 가정과 같은 사랑으로 살 것이다(my vision of loveliness).

3. 대상이 인간이든 신이든 짐승이든 모두 사랑을 진실하게한다. 진실하게 주고 또한 진실을 받을 줄 아는 인간 이것은 어렵고도 또한 가장 쉬운 것인 가도 모른다.

4. 많이 읽고 많이 듣고 많이 느끼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富를 축적해서 더욱 보람있게 많이 활동하며 나의 人生을 즐기고 싶다.

5.그때 당시 까지 나의 독서중에서 기억되는 글귀들은:

슈바이처 박사:

1)“현실에 대한 내 인식은 염세주의자이나, 의지와 희망은 낙천주의자 이다.”

2)“내가 신앙인이 된 이유 말인가? 그것은 인생의 모험이 헛된 절망, 헛된 의문으로 끝나지 안는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일세.“

까뮤(실존주의 작가):

1)“만일 누가 정의의 규범을 이 세상에 적용시키고 천주를 이 정의의 재판에 상정 한다면 많은 사람이 천주를 처단할 것이다. (그는)이렇게 만들어진 세상을 자신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할때 반항밖에 다른 대답이 없었든 것이다.”

2)“인생 이란 연습할 시간도 갖지 못한체 자기가 맡은 역을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Drama(극)입니다.“

聖아오스딩 의 참회록에서:

“이렇게 오래고 이렇게 새로운 아름다움이여! 나는 당신을 늦게 서야 사랑 했습니다. 당신은 내 안에 계셨고 나는 내 밖에 있었으며 또 나는 내 밖에서 당신을 찾았습니다. 나는 내 자신을 당신의 조물들 사이에만 흩어 놓았으며 나는 그들의 아름다움과 맞닿아, 내 자신을 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같이 있지 않았던들 존재하지도 못할 이 사물들은 나를 당신 에게서 멀리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톨스토이의 방랑시(1966.9.26.일자 새벽3시에 암송):

쓸쓸하고 괴로운 이 한밤을 그대들은 기억할날이 있으니리.

내숙명이어! 창밖에 눈보라는 마치 인생의 종점을 고하는듯

숲속에 방황하나니, 공중을 나는 새마져 희망의 노래를 잊었으며

염통의 핏줄기가 얼어붙은 그 날개로 차디찬 나뭇가지에 외로이 앉아,

참다운 벗들을 부르며 흐느껴 울때, 내홀로 가정을 영별코져 하노니,

흘러간 팔십년의 내생애가 내 감추어둔 슬픔에 부닥치어

다시는 돌아올수 없는 방낭의 꿈을 앉고 몸부림치는 순간

핏투성이의 노력들은 허무에 맞닿았나니, 사랑과 행복은 병들고 시들어

끝없는 탄식만이 앞길을 재촉한다. 내비록 정열을 보조리 쏟아 끝끝내 지내려 했으나. 그것도 물거품이 되었노라.

지평선 저쪽의 아름다운 천사가 불안과 슬픔에 가득찬 내눈동자와 맞서노니, 나는 인생의 십자로에서 날카로눈 신경을 무디게하고. 그대의 가련한 모습을 상상하며 염통의 고통을 억제하노라.

그러나 그대의 입낌떨림은 내손에 닿을수 없으며 가벼운 오한이 내몸을 괴롭힐때, 내 양뽈이 새출발을 고하노니,

오- 나는 그무엇에 순종하리있가!

그러나 나느 그대를 피하여 서슴치않게 떠나겠노라 미련이 무엇이며 낡은 인연 무엇하리 영원한 생명을 후세에 전하려고 나는 말없이 떠나겠노라.

아- 그누가 알려무나 이고백을 그러나 그대는 기억하리라. 이미 38년을 살아온 이집은 빛을 잃었으며, 우리들에게 가장 원망스런 과거사 우리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져 갈 때, 우리는 진리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로다 내 불우한 운명을 박차고서 거룩한 어머님의 영혼에 정성서린 기도를 올리노라.“

실존주의 철학 과 문학 정리(1967.4.18.일자에 기록):

야스퍼스/하이데카 철학 과 샤르트르/꺄뮤 문학 의 이론정리.

6. 나의 사상/이상 내 인생(24세)의 최초의 연설(1966.11.10.일자에 기록):

제목은 “한국 사회에 우리세대가 리-더(Lead)해야할 좌표는?”

7. 사랑사건/love affair &story 에 관하여(1966.11.16.일자에 기록):

이 일기장 기간에 나의 이성간의 교제 my vision of loveliness 에 대해서는 감정과 감성만 높았고 합리성이 훨씬 떨어져 예리하고 진솔하게 전개되는 내 인생의 일기장 내용정리에 오히려 방해가 되어 모두 없애 버렸다. 너무 미화 시키기도 싫었고 그 연애기간 3여년동안 걸쳐 일년에 한두번 만난 것이 고작 이었기에 정신적으로만 이어져 왔던 셈이었다. 사랑 이야기(Love-affair)에 내 정신과 정성을 쏟아넣을 시간도 부족했고 시간이 많이 소모되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 했었다. 일기에 이것에 관한 코멘트 를 조금한 것이 전부 이다.

8. 나의 종교관 과 내가 선택한 천주교에 관하여(1967.3.24.일자에 기록):

9. 이 기간 즐거이 암송했던 영시및 영화대사들(1967.5.7.일자 마즈막에 기록):

한밤중에 실존주의철학(實存主義哲學)을 내 나름대로 정리해보고 싶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 “뿌리깊은 남간 바람에 아니 밀쎄 꼿조코 여름하 나니”라고 했듯이 나는 대학 일학년때 철학과 문학으로 짧은 시간내에 내 인생의 뿌리를 튼튼하게 쌓아놓고 그런 다음 더 많은 시간을. 내 전공학문과 현실생활에 전력을 집중할려고 했었다.

<실용주의 철학의 새 개념 재정립 필요>

세기전과 중세기의 관념론을 거처 19세기초의 영국의 경험론과 북유럽의 실존주의를 거처 19세기 말의 미국의 새로운 개척정신 죤듀이의 프래그마티즘 실용주의가 탄생한 셈이다. 근세기초의 한국 다산 정약용의 실사구시에도 가깝다.

오늘날 현대철학은 세기전 의 “탈레스,쏘크라테스, 플라톤” 의 관념론을 거쳐 독일 “헤겔” 의 관념론과 영국 “베이콘” 의 경험론을 거쳐 미국“죤듀이” 의 프래그마티즘에 이르고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키케르케골”을 실존주의 창시자로 하여 야스퍼스/하이데카 등등의 실존주의 철학자와 실존주의 문학가“싸르트르”/“가뮤“에 이르기까지 실존주의 가 널리 파급 되어온 셈이다.

이 실존주의가 대두된 것도 19-20세기사이 神이 우리인간을 외면했다고 해서 시작 되었고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은 아무리해도 인간의 힘이 부족한데 대해서 시작 되었던것 같다. 이 實存의 실은 誠實과 眞實과 現實의 복합성을 의미 하는것 같다. “아놀드 토인비”역사 철학자가 지적했듯이 오늘날의 인류의 적이 바로 인류 라는 결론이 나왔기에 더욱 그 실존의 부르짖음이 두럽기도하여 유신론자들은 실존을 신과함께 하고저 했을것 같다.

그 철학자들의 철학적인 개념의 이야기를 읽어보자;

1. 아리스토 텔레스는: 인생은 목적과 수단(手段)의 체계(體系)다.

2. 야스퍼스(實存主義 哲學家;실존주의 철학가):

현대는 여론과 광고의 시대요, 현대의 대중사회는 개성 보다는 평등을, 질대신에 양을, 인격 대신에 기능을 내 세우는 사회며 이러한 사회 일수록 위대한 인물은 유능한 인물의 배후로 사라지고 재치있고 아첨과 추종에 능한자가 귀여움을 받고 물질적 성공주의자가 활개를 치는 사회이다. 인간은 실존으로서의 단독자로서의 인격으로서의 깊이 와 보람과 품위를 상실하고 실존없는 현존으로 전락하고 만다. 인간은 혼없는 기계인이 되고 인격을 상실한 전문인이 된다.

3. 샤르트르는(實存主義 文學家):

너는 자유다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발명하라 그리고 자기의 존재의 선택을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 그렇다고 실존주의(實存主義)가 개인주의(個人主義)나/주관주의(主觀主義)는 아니다. 타자의 존재는 나의 실존의 조건이다. 타자는 나의 실존에 없지 못할 조건이다. 타인은 내가 생각하는 자(者)인것 같이 그도 생각하는 자요 내가 뭘 요구하는 것처럼 그도 요구하고 내가 자유인것처럼 그도 자유다. 타자의 존재는 나의 실존의 조건 곧 인간조건이다. 실존주의적 휴매니즘은 실존의 자유위에서는 행동적 휴매니즘 이다. 유물론은 결국 실증주의를 가장한 하나의 형이상학(形而上學)이고 변증법(辨證法)은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4. 까뮤(실존주의 문학가):

1)“만일 누가 정의의 규범을 이 세상에 적용시키고 천주를 이 정의의 재판에 상정 한다면 많은 사람이 천주를 처단할 것이다. (그는)이렇게 만들어진 세상을 자신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할때 반항밖에 다른 대답이 없었든 것이다.”

2)옥스포드 졸업식장에서 “인생 이란 연습할 시간도 갖지 못한체 자기가 맡은 역을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Drama(극)입니다.“

5. 신의 참을 늦께 발견한 聖아오스딩 의 참회록에서:

“이렇게 오래고 이렇게 새로운 아름다움이여! 나는 당신을 늦게 서야 사랑 했습니다. 당신은 내 안에 계셨고 나는 내 밖에 있었으며 또 나는 내 밖에서 당신을 찾았습니다. 나는 내 자신을 당신의 조물들 사이에만 흩어 놓았으며 나는 그들의 아름다움과 맞닿아, 내 자신을 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같이 있지 않았던들 존재하지도 못할 이 사물들은 나를 당신 에게서 멀리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6.. 하이데카(實存主義 哲學家;실존주의 철학자):

죽음의 무앞에 단행되는 결단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세계를 전개한다.

7. 실존(實存):

거짓된 자기가 아니고 진실된 자아요 비본래적인 자기가 아니고 본래적인 자기다. 실존은 현실적 개념이면서 그것을 넘어서 규범적개념(規範的槪念)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적인 나가 아니요, 있어야할 이상적인 나다. 인간은 무엇이냐 보다 무엇이어야 하느냐에 더 Accent를 두는것이 실존철학(實存哲學)의 인간파악이다. 그러므로 실존은 Sein(存在;존재)적인 인간요소 보다는 Sollen(當爲;당위)적인 인간의 측면이 강하다. 실존철학은 당위적(當爲的)인 이상적 인간상과 가치관(價値觀)을 제시(提示) 하려고 한다.

8. 키엘게르케골(實存主義 哲學家;실존주의 철학가)의:

신앙적 유실론적인 실존도 있고 샤르트르 처럼 무신론적인 실존도 있다. 공통적인 것은 (1)개별적인 주체성 (2)결단적 자유의 존재다. 또한 자유에 대한 분명한 책임을 짊어진다. 즉 본래적(本來的) 자기를 선택하는 주체적 결단을 갖는것이다. 현실/진실/성실의 실존주의(理性Logos와 感性Pathos)는 현실을 타개(打開)하고 현실을 변혁하고 현실을 초극(超克)하려는 哲學이다.

9. 영국의 경험 철학자 Bacon 은 지식 이란 정의를:

개미처럼 수집만 해서도 안되고(經驗派), 거미처럼 이론만 뽑아내어서도 안되고(理論派), 수집(蒐集)과 동시에 창조하는 꿀벌을 배워야한다. 지식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지식은 사람에게 힘을 주기 위한 수단이요 수단 가운데 서도 가장 효과 있는 확실한 수단이다.

10. 야스퍼스의 철학의 정의: 개체(個體)의 초월(超越)에로의 노력(努力) 이다.

11. 존듀이의 그래그마티즘: 경험과 사실에 바탕을 두고 집념으로 이성과 이상의 개척정신을 도입한 셈인것 같다.

12. 학문: Nature can not be commended except by being obliged.

1966.9.2.(金)맑음:

가을을 접어보는 9월초 그러나 더위는 아직도 여름날을 못내 아쉬워 쉽게 떠나지 않는 모양이군, 허망한 사색의 시간이 하루를 매 꾸어 가니 보람없는 것인 가보다. 어떻게 군사학책은 자꾸만 멀어져 가고 정신적인 곰팡이가 피지 않았을 가 한다. 질서를 잃은 듯한 사색의 방향을 똑바로 가져야겠다. 맥없이 집에 와서 보니 친구의 편지가 내 상 위에 조용히 놓여 있으니 특히 붉은 색 리본의 봉투가 피로를 순간 이나마 잊게 했다. 그 내용처럼 입에서 나온 성실을 A란 친구도 B란 친구도 모두 신념굳게 행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과연 그렇게 성실의 하로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양심의 가책이 든다. 말하면 괴변이 되고 말 것이다.

과거의 나는"함축성있는"이란 형용사를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싫은 것은 아니지만, 요사이는"차분한"이란 형용사를 더 사용하고 싶어한다.

저녁에 방송국 친구를 찾아 "오르간"을 만지듯 피아노를 쳐보았다. 순간 이나마 흐뭇했다. 쇼팽 이별곡과 사랑의 기쁨/아목동아/슈벨트의 아베마리아/들장미/바위고개등등 음악은 그렇게 인간생활에 전부인냥 필요한 것 같았다. 인간의 두뇌를 Cooling시켜 주는 약제와 같다. 한국의 현실과는 너무나 먼 유토피아적인 취미이지만 주체를 저버린 나는 무용한 존재이겠지. 어쨌든 오늘은 내 자신만이 느끼는 흐뭇하고 훌륭한 날이었다.

1966.9.3.(土)맑은 후 비:

수다스런 거리라고 나는 종종 도시생활을 비웃었다. 내 자신의 열등의식이 아닐 까? 마음것 즐기는 수완이 없는 모양이지! 과연 그럴 까? 그것은 허황한 대답이 아닐가! 나는 많이 읽고 많이 느끼고 부(富)를많이 축적(蓄積)해서 많이 활동하며 또한 인생을 즐겨 보자고 했는데 그것 때문에 그러한 신념 때문에 수다스런 가운데의 아름다움을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 외적 의식을 가지려는 것이 젊음의 본능적인 것. 노소가 마찬가지이겠지만 오히려 그 외관적인 의식도 현대의 자본주의사회 경제만능주의 와 "돈" 만능주의 시대엔 호구지책을 위해 불가피한 서비스업을 위해 마땅한 것이라고 수긍도 가지만 그 대답으론 만족이 되지 않는다. 오늘 저녁에도 극장 가자고 하는 친구의 권유를 거절하고 피아노를 약3시간에 걸쳐 내 마음대로 손가락이 제 멋대로 가는 대로 내리 쳐보았다. 왜냐! 그것이 영화감상 보다 나에게 야릇한 보상의 기쁨을 더 많이 갖다 주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러나 모든 빗나간 취미는 적당하게 가져야 할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1966.9.4.(日)맑음:

아침부터 친구와 약속이 있어 오전9시에 친구를 만나고 보니 막상 갈 곳을 몰랐다. KBS 광주방송국 을 갔다가 다시 내려와 영화감상을 하고 집에 돌아와 조용한 시간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지냈다. 그런 대로 자미 있는 시간 이였다고 여겼다. 나의 생활이 하루를 훑어보아도 명상 의 시간이 더 많이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공부를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때때로 나는 나만의 정신착란으로 갈 바를 못 잡고 순간순간 당황할 때가 많다. 그러나 아직은 적극적인 계획을 착수하지 못하는 편이다. 가끔 공백의 시간을 따라 추억속에 잠기면 그 순간의 기쁨 또 말할 수 없을 정도라네. 그러한 시간은 어느 한도 내에서는 좋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지나치면 백해무익한걸로 되고 말지, 마치 마취제를 먹은 사람처럼 시간 감각이 없다 말시.

1966.9.5.(月)흐린 후 비:

염증이 생겼는지 몹시도 가기 싫은 군사교육을 또 받으려고 나갔다. 안 가도 되지만 제대(예편)한다는 미명 이라고 할까 그러한 명제 로 태만을 부리려니 성실 이란 낱말과 대칭 관계로 혼란 스럽다. 4주까지는 잘 해보자는 의도에서 출근 을 했다. 초급장교가 군복 을 자신의 희망 과 의도대로 벗고자 하는 자는 이 초등군사교육 동안에 퇴교 를 당해야만 가능하므로 이 기간동안 잘 조절 하여 마치지 않으면 퇴교는 커녕, 호적상에 파면으로 기록 되어 형법상 전과자로 남게 된다고 했다. 그러기 때문에 파면 아닌 명예퇴교 혹은 명예제대 를 하려고 하니, 교육장 교관 과 불화 그리고 중대장/ 대대장/연대장과의 불화 등 정신적 으로 무척 어려운 시기였다. 나의 귀속부대 대대장 께서는 좋은 성적 으로 교육과정을 수료 하고 귀대할 것으로 잔뜩 기대 하고 계실텐데 (교육출발 신고 할 때 소속 부대장이 부탁했기 때문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자면 군복을 적기에 벗을 수 가 없기에 나의 정신적 혼란 은 말로 표현 할수 없을 정도 였다. 제대 하자마자 또 복학 해야하고 등록금 도 걱정되고 해서 여러 가지로 내 머리뿐 아니라 해골 속까지 아프다. 거기에다 교육대 대장 은 눈치도 없이 교육장 출근성적 이 안 좋다고 매일 이다 시피 불러 젖히니, 아! -- 나는 그 무엇에 호소 해야 할지? 막상 군사학 은 어떻게 되었든 내 전공분야 어학에 준비 겸 매진 하련다. 그것 외에 다른 것은 날이 갈수록 권태만 느껴진다. 경쟁사회 에서 살아 남으려면 시간과 마음의 다짐이 절대 필요 하고 더욱이 시간이 절대 부족한데, 군 제복을 입은 군인이 제 임무를 망각한 행위 인 것 같아 마음도 아프다.

구태여 표현 한다면 병정놀이가 소질에맞지 않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변화를 가지고싶다. 이것은 내가 장교후보생교육을 받을 때부터 가진 복안 이었다. 의식주 해결 과 저녁이면 공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졸병 보다 장교를 지망했고 그후 제대 하여, 좀더 포괄적인 자유사상 을 습득 하기 위해 군복을 될 수 있는 한 빨리 벗으려고 했었다.

이 군대는 인간의 Idea를 억지로라도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단순" 쇠뭉치를 만들려는 곳 "때리면 울리는 종(鍾)"의 역할이 주 임무인곳 이것이 군인의 기본 이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나의 군 생활은 나의 인생공부에 많은 것을 제공해주었다. 인간개조 인간재생창 이라는 별명을 가진 육군보병학교 교육과정과 전방 DMZ 관측소에서 관측장교 그리고 비무장지대 GP장 근무까지 모두 나에게 많은 느낌을 주었다. 역사의 괴상한 장난 속에 만들어진 억지의 국경선 이것은 이념의 분쟁선이다. 공산주의 대 민주주의 란 어마어마한 사상전의 국경선, 인간-인류의 적(敵)이 바로 인류라는 결론을 내린 "아놀드 토인비" 역사학자의 말씀이 수긍이 간다. 군에서 초급 지휘자 로서 때로는 피지휘자로서 가지가지의 난문제 에 대해 나의 윗사람은 밀어달라 하고 아랫사람은 당겨 달라하고 이런 갈등 가운데서 나는 근면과 인내로 내 나름대로 생활해 왔지. 그러나 우리 나라의 군대는 역사가 짧고 조직(system)의 미숙과 고유전술 의 부족으로 과도기 상태다. 아직은 내용적으로 혼란(Chaos)이라고 평하고 싶다.

1966.9.6.(火)흐린 후 비:

어제와 같이 또 책을 가방에 넣고 강의실에 들어갔다. 군대에서는 교육이라 하지 않고 훈련 이라고하여 과거에는 교관 이라고 하던 것을 훈련관 이라고 칭(稱)한다나. 그런데 그 훈련 가운데서도 나는 내 개인 사책(私冊)을 몰래 몰래 보면서 하루의 시간을 메꾸었다. 어떻든 하루가 몇 달을 지내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 원인은 바깥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나 자신속 안에서 찾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원인을 나는 알고 있다. 한번 먹은 마음의 각오여서 하는 수 없는 일 무난히 마치고 갈 수 있는 새로운 생활태도가 필요할 것 같다. 하루도 편하지 않을 것 같은 요즘의 나를 다시 한번 찾아봐야겠다.

영혼과 육신의 분리 속에 새로운 신(神)을 긍정 하면서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좀더 신(神)의 존재를 구체적 으로 알고싶고 또한 사이비(似而非) 종교인 이 될까 염려 되어 그렇게 빨리 따르지를 못하고 있다. 내가 神을 긍정 하고 나의 생활이 영혼과 육신이 일치될 때, 이와 같은 갈등 의 생활의 고민 이 없어질 것으로 여긴다.

1966.9.7.(水)맑음:

미네르바의 올빼미, 지혜의 여신이 황혼 에 날개를 펴고 날아다닌다고 철학자“헤겔”교수가 말씀했듯, 인생의 하루의 일을 두루 살피고 저녁이면 반성과 모순 을 지양(止揚)할수있는 것이 또한 지성인이 할 일이다. 사람의 길이 모두 그러하듯 나에게도 십자로의 길에 선 것이 한 두 번이 아닌 늘 갈등 에서 살아왔다. 말하자면 마음먹은 길을 단안을 내렸는데, 그 길을 계속 찾아가는 방법에 있어 많은 갈등으로 겪어 왔다. 저 하늘의 전능하신 神도 이렇게 가끔 망설이며 머뭇거릴 때가 있을가? 神이든 인간이든 동물이든 움직이는 생물이라면 영혼을 가진 어떤 형체이던 모두 갈등의 십자로에서 머뭇거리지 않을까. 하루하루가 익어가고 붉어 가는 가을이 가까이 오고있다. 저 맑은 하늘 별빛 모두가 일년을 회고하는 계절 인 모양이다. 나 역시 다음날을 위해 보람있는 시간으로 명상 에 잠겨보자. 그 명제 가 어떤 것이든 내 전공 과목 에도 흐릿한 실력뿐인 내가 가소롭기만 하다. 하나라도 뚜렷하게 해야될 급한 시간이 나에게 왔는가 보다.

1966.9.8.(木)맑음:

나는 실기시험을 치며 질문하는 말에 모르겠다는 게 대부분 이었다. 객관이 나를 주시했을 땐 모르는 것이 큰 자랑처럼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이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으니 내 몸은 그렇게 아픈데도 없이 온몸이 노곤(勞困)하고 몸살난 기분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항상 나 혼자 생각을 하고 마음에 맞는 동기들에게만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다른 동기는 나를 거만(倨慢)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내역시 속이 텅텅 빈 무지의 인간이지 Elite(선민)는 아니다. 다만 휩쓸려 가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우선 의사(意思)가 서로 상식선에서도 통하지 않을뿐더러 나의 길과 방향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아직 나는 방탕해서는 안되겠다. 아직 그렇게 즐길 때가 아니다. 예수의 말씀을 인용해보자. “마태 복음 5장3-4절 :애통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라고 하듯 인생살이의 고난, 이것은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강력한 약속이다. 예수의 죽음이 그러했듯 고행과 고난 그리고 고민 속에서 하나의 뜻을 펼 수 있겠지요.

1966.9.9.(金)맑은 후 흐림:

학과를 마치고 저녁에 OBC 과정(초급장교 교육)의 학생장 그리고 동기 한사람과 3사람이 사복(私服)차림으로 당구를 한 게임 치고 난 다음 막걸리 한잔을 마시며 진지(眞摯)하게는 들어가지는 안 했지만 간단한 discussion 을 가졌다. 그 가운데 나를 충고 해주는 말이 많았다. 그것은 즉 단체 속에 하모나이즈 하지 않느냐. 내가 늘 생각하고 있는 길이 있지 않느냐 하는 충고와 권유 그래서 나는 전에와는 달리 나의 소신을 구체적 으로 표현 하기가 귀찮았다. 한번 말을 끄집어내면 복잡 하고 그 긴 강변을 털어놓기가 귀찮았다. 다만 그 이야기 속에 나의 느낀 바는 자못 클 것으로 여겼다. 저녁이 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먹고 곧장 걸었다. 숙소와 거리는 멀었지만 술만 먹으면 몸이 피로감 이 들어서 집에 와서 잠을 청(請)하고싶어 걸음도 빠르게 집으로 달려와 그냥 잠이 들었다.

1966.9.11.(日) 비:

휴일의 기분이나 특별한 계획이 없어 오전엔 곤히 잠을 청했다. 비도 내리고 해서 집에 있다가 친구들도 찾아오고 뚜렷한 목적도 없는 우울증에 피아노 집의 친구 하숙방을 찾아갔다. 친구를 통하여 건반(鍵盤)에 앉고 보니 능숙한 솜씨도 없는 내가 거만함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무슨 다른 악기보다는 피아노의 리듬이 나에겐 그렇게도 감미(甘味)로왔다. 그러기에 내가 타지 못해도 능숙한 사람의 연주를 듣고싶었다. 저 악기(樂器)만은 내가 보통쯤은 쳐야겠다는 것이 내가 늘 내 마음에 담아온 심정 이다. 이러한 마음은 다른 한편으로 생각한다면 너무나 고상(高尙)한척 멋 부리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고요하게 느낀 우울증은 고요하게 푸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나의 모순(矛盾)일수도 있겠지. 오후 3시에 "Roman Holiday"란 영화를 감상했다. 젊음이란 그렇게 얽매여 사는 가운데 발동(發動)이 일어나는 것이 인간의 본능 인가보다. 그리고 젊은 사람이건 나이 많은 사람이건 사랑이란 두 갈래 길에서, 순간을 즐기기 위해서 하는 것과 영원을 위해 하는 것 가운데 분별(分別)을 두고, 현대의 그 수많은 로맨틱한 사연들이 엮어지는 모양이야. 나는 나의 애정관(愛情觀)은 아무렇게나 하는 순간의 애정은 내가 그것을 알기 시작(始作)한때부터 저주(咀呪)해 왔다. 그러기에 쾌활을 마음 것 펴지 못했다. 그것이 고질화 되어 이젠 제3자의 시선(視線)이 나를 허무주의자 로 칭(稱)하게 이르렀다. 나의 마음속으로는 아니다 하고 외친다. 분명히 나는 허무주의자 는 아니다. 그럼 무엇일가 이상주의 이자 지독한 현실주의자 라고 나는 자칭한다. 그러나 미래 지향적(指向的)인 이상주의 로 살아오는데 온 마음을 치중했다. 그러기에 가끔 친구들 가운데 미래도 과거도없고 현재만 마음껏 만족하고 즐기고 싶다고 하는 친구가 있을 때, 나는 기가 막힐 정도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에고이스트(Egotist)한 악성(惡性)품 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렇게 사귈 사람이란 마음대로 구(求)해지는 것이 아니었기에 경험이 없는가보다. 언젠가 그렇게 사귀어 보려고 마음을먹고 편지 받고 보내고 한 적도 있다. 그러다가 답이 오지 않아 몇 차례 걸쳐 했으나 역시 오지 않았다. 그래서 정신적인 시간이 아까워 깡그리 포기해 버렸다.

1966.9.12.(月)맑음:

월요일인 데도 나는 학교를 가지 않고 방구석 신세가 되었다. 아프기도 했지만 조용히 쉬고 싶었다. 딱딱한 어학책을 보다가 오늘은 교양서적 을 펼쳤다. 그랬더니 호기심 이 자꾸만 더했다. 정말 이러한 서적들이 피로를 회복 시켜주는 것 같았다.

내용인즉 기독교 즉 구교(catholic)보다 신교(protestant)를 더 믿음의 가치를 찬양해 두었다. 그것은 동양의 성인이신 공자(孔子)의 모(母) 보다 또는 노자(老子)의 모(母) 보다 맹자(孟子)의 모(母)를 더 칭송하고 있는 이유의 하나다. 마찬가지로 마리아를 예수 보다 더 숭배한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를 낳은후 요셉과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낳았다는 것.

Rome의 총독 빌라도의 법정에서서 예수는 “내가 진리를 증거하러 왔다.” 고한 예수는 고난의 생애에 진리에 살다죽었다. 믿는 것이 진리였고 그러한 고난의 역사 가운데서도 예수는 살아지지 않았다. 술책에 능한 자가 일시적 성공한 者라면 진리 즉 진실과 참은 영원한 성공일 것이다.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공주와 사이에 아이까지 낳게 한 파계승(破戒僧) 원효대사(元曉大師)께서 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수다한 사람이 우러러 존경(尊敬)함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 나라의 종교인들은 우리 나라에서 살고 간 이 위대한 인격에 대해서 깊이 배우고 그 생애를 씹어 볼만하다. 神을 잃은 우리 민족에겐 이 영혼의 통일이 먼저 있어야 국토통일도 있지 않을 것인가 생각된다.

내가 작년(1965.8.8.) 전방 관측소에서 근무하면서 지은 詩한수를 여기에 옮겨 볼까한다.

제목은 <나와 개울물의 몸부림>

“달빛이, 바람소리가, 나뭇잎이, 모두가 잠이 들었다.

그러나 개울물과 나는 잠들 줄 모르고 뜬눈으로 소리를 질렀다.“

1966.9.17.(土)맑음:

나를 데리고 내 영혼이 학교에 왔는지 내 육체 스스로 왔는지 내가 학교를 나왔고 또 지금까지 내 생명이 걸어왔다. 군생활이냐 군복을 벗느냐의 문제를 신중히 숙고해서 월요일 다시 찾아오라고 높은 분이 말씀하셨다. 내가 애초에 예상한 것 보다 좀 빠른 질문이다. 아무튼 이쯤 되고 보면 나의 머리도 복잡하지 않을 수 없다. 집에 오자마자 간단한 사복차림으로 슬리퍼를 끌고 뒷산을 산책 했다. 내 마음의 허전함은 혼자서 풀기가 힘들 정도였다. 노래도 불러보고 고함도 쳐보고 해도 내 두뇌의 혼란을 평온하게 하려고 했으나 마찬가지였다. 결국은 “명랑”이란 약을 복용했다. 그때서야 다소나마 괜찮았다. 저녁에는 피아노 건반(鍵盤)으로 내 짧은 밑천의 좋아하는 음악은 모조리 두들겨 보았다. 그 음율에 나를 취(醉)하게 해보았다. 이윽고 나에게 평온이 왔다.

따분한 날이기도 하지만 지금 심정은 기분이 좋기로 말할 수 없다. 더욱이 “권성진” 친구가 보내준 서울대학 학보 에는 읽어야할 기사가 많았다. 정말 죽마고우의 그 우정이 이 한 장에 속속히 박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또 시달려야할 내일이 걱정된다. 순간 이나마 잊어 보자.

1966.9.18.(日)맑음:

아침은 산으로 산책 을했다. 요즘 내 생활이 그러하듯 항상 불안감에 방황하고 있는 심정 이다. 집에 들어와서 무엇인가 생각을 해보았다. 결론은 잘 도출(導出)되지 않았다. 고등학교후배 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옛추억의 학창시절을 더듬으며 웃기도 하고 재미있는 시간들을 보내기도 했다. 현재의 내 생활이 어떻게 생각하면 무의미함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좀더 박차를 가(加)할수 없을까 하고 혼자 독백도 해보았다. 내가 나의 탐구시간으로 집착할때는 항상 나는 나의 부족감(뚜렷한 실력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神을 나는 긍정한다. 나는 神을 따르고싶다. 외경(畏敬)과 번뇌(煩惱)가 심(甚)할 땐 나는 神을 따르고 싶었다. 종교 이것이 인간생활에 필요한것일거야 진실된 나를 찾고 차분한 나를 찾고 구체적인 나를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야.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나의 위안(慰安) 나의 독백의 기도를 드려보자

“神이여! 내가 갈 길은 어디입니까? (神이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Quovadis Domine!); 오직 그 길은 너가 생각하는 길이며 너가 괴로워하는 길이며 또 너가 참아 가는 그 길이니라.”라고. 하느님과 단독 대화를 했다고 내 영혼은 바라고 있었다.

1966.9.24.(土)맑음:

무척 허전한 마음으로 학교에 나갔다. 나 역시 그렇게 태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 자신이 만든 생각의 갈등이란 여러 가지로 혼란을 가져오게끔 했다. 시범(示範)이란 교육이었다. 그런데 웬 일인가 받아보아야 할 교육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신경 과민증(過敏症)에 걸린 기분이다. 왜 이렇게 번뇌(煩惱)가 많을가. 시간 중에 신문을 펼쳐놓고 읽었다. 읽는시간은 머리가 가벼웠다. 오후에는 통신시험 을 백지(白紙)낸 덕분(德分)으로 불가가 나왔다. 이렇게 점수 를 조절하여 시험 치르지 않으면 평균 60점 이하가 나와야만 제대(퇴교)가 가능하다고 한다. 너무 일찍 퇴교하면 학교수료전 본부대 에 귀대 하게 된다. 그래서 점수를 조절하여 수료때까지 끌고 가야, 이 몇 달간의 후방생활이 군생활 마지막 후방생활이 되고 또한 오는11월1일자 중위(中尉) 진급심사 에 하자(瑕疵)가 없게되는 셈이다.

퇴교와 제대는 소위 딱지를 떼고 중위로 진급한 후에 본격 구상 해보자는 것이 나의 계획 이자 프로그램(Program)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스릴도 있고 이런 역경도 해치고 나갈 수 있다는 나의 미래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싶었다. 내게는 꿩 먹고 알 먹고 이지만 국방과 국가에 대해서는 죄스러울뿐이다.

그러나 국가가 애초 모집때 약속한대로 단기복무 3年 만기제대를 보장해주었다면 이러한 상호의 불행이 없었을 거라고 나는 참 아쉬워했다. 모든 것을 각오한 처사였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내 생활의 자태를 분석하면 알찬 생활이 되지 못하고 허황한 생활이다. 지금 같아선 군사학 을 완전 포기 했으면서도 하고싶은 전공학공부 도 제대로 계획대로 못하고 있다. 전공학을 좀 하려니 현재의 내 신분에 많은 장애를 받고 있다. 경쟁에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해야겠지만, 제대하는 방법이 너무도 너무도 어려워서 전공학에는 손이 미치지 않고 있다.

원래 장교 임관시험 시에는 단기복무 만3年이라고 기록된 신문과 서류를 보고 시험을 쳤는데 이제 와서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하니 국가가 장교 입교생에게 기만한 공고였다. 이러한 부당한 일 들이 우리 나라에는 너무 많은 것 같다. 국가가 약속이행을 하지 않으므로 해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낭비하고 자라나는 젊은이들의 고민과 번뇌를 가져오게 하는 것은 오히려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해라고 생각된다.

저녁에는 친구들이 영화감상 하러 가자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선뜻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남아서 있어본다. 좀더 차분한 생활을 해보고싶다. 자신의 생각은 자신이 해결하는 것. 가장 다정한 친구가 아니면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해서는 안될 일. 나 혼자 고민하고 나 혼자 해결하자. 그리고 침묵(沈黙)! 묵(黙)! 괴로워도 침묵을 지키자. 그런데 웬 일일까, 자신을 부정하고 싶고 도대체 내가 무엇이냐, 무엇이 들었느냐, 정말 미생물보다도 미약한 존재다. 뚜렷한 실력도 없는 내가 무엇을 떠들려고 하느냐! 고독이란 미명하에 자신을 망각과 도피를 하지 말아야지, 이도희 군!

1966.9.26.(새벽 3시):

나는 다음과 같은 “톨스토이의 방랑시” 암송해 보기로 했다. 이 詩는 대학교 1-2학년때 고향 蔚山출신 친구들이 가장 많이 모인 숙소 겸 장소 “동천학사(東川學士)”에서 모두들 유행(流行)처럼 암송경쟁 을 하며 읽혔던 것이다.

<톨스토이의 방랑시>

“ 쓸쓸하고 괴로운 이 한밤을 그대들은 기억 할 날이 있으리라. 내 숙명이여, 창밖에 눈보라는 마치 인생의 종점을 告하는 듯 숲 속에 방황하나니 공중을 날으는 새 마저 희망의 노래를 잊었으며 염통의 핏줄기가 얼어붙은 그 날개로 차디찬 나뭇가지에 외로이 앉아 참다운 벗들을 부르며 흐느껴 울때 내 홀로 가정을 영별코저 하노니 흘러간 80年 의 생애가 내 감추어둔 슬픔에 부닥치어 다시는 돌아 올 바 없는 방랑의 꿈을 앉고 몸부림치는 순간, 피투성이의 노력들은 허무에 맞닿았나니 사랑과 행복은 병들고 시들어 끝없는 탄식만이 앞길을 재촉한다. 내 비록 정열을 모조리 쏟아 끝끝내 지내려 했으나 그것도 물거품이 되었노라. 눈에 보이지도 않고 내 가슴을 찢는 듯한 마음의 고통으로 내 몸은 눈물에 어리어져 희망을 잃었노라. 지평선 저쪽의 아름다운 천사가 불안과 슬픔에 가득 찬 내 눈동자와 맞서나니 나는 인생의 십자로에서 날카로운 신경을 무디게 하고 추억의 실마리를 불살라 버리고서 그대의 가련한 모습을 상상하며 내 염통의 고통을 억제하노라. 그러나 그대의 입김 떨림은 내 손에 닿을 수 없으며, 가벼운 오한이 내 몸을 괴롭힐 때 내 양 볼이 새 출발을 告하노니. 오! 나는 그 무엇에 순종 하리있까. 그러나 나는 그대를 피하여 서슴지 않고 떠나겠노라 미련이 무엇이며 낡은 인연 무엇하리 영원한 생명을 후세에 전하려고 나는 말없이 떠나겠노라. 죄 없는 진리만을 사랑하는 내 일생과 향그러운 고통속에서 희망을 찾으려 애써온 발자국도 아! 그 누가 알려무나 이 고백을 그러나 그대는 기억하리라. 이미 38연을 살아온 이 집은 빛을 잃었으며 우리들에게 가장 원망스런 과거가 우리들의 머리 속에서 사라져 갈 때 우리는 진리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로다. 내 불우한 운명을 박차고서 거룩한 어머님의 영혼에 정성서린 기도를 올리노라.”

1966.10.9.(日)흐림:

세탁을 좀하고 방을 청소하고는 하숙집 주인할머니와 하루쯤 교회에 나가 보았다. 들어가자마자 무엇인가 주저감이 들었다. 일단 들어온이상 기도를 했다. 코러스의 찬송가가 시작되고 이어 목사님의 설교가 있었다.

내용인즉 “빌립보서”신약 4장 4절부터 5절까지 였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 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대를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리라 . . . . ” 라는 구절이었다.

나는 시종일관 무슨 기도에 잠겨보았다. 그렇지 고통과 번뇌속에서도 기뻐 할 줄 아는 마음. 이것이 자신의 행복이요 평화다. 기뻐해야지. 오후에는 충분한 휴식을 집에서 취했다. 이제 좀 공부를 시작 해 봐야겠는데 그 무슨 번뇌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믿음 이것이 내 생애 에 유일한 마음 안식처 가될가. 어떻게 소극적 으로 생각하니 일요일 아침시간이 아까운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겠지 마음의 시간, 이것은 얼마든지 다른 모든 휴식시간을 초월 할 수 있는 것이겠지.

1966.10.10.(月)흐린 후 비:

아침 통근차 를 타로 가는 길에 서울로 편지를 붙였다. 아침 첫 시간에는 몹시 잠이 와서 참고 견디기가 힘들었다. 둘째 시간에는 다른 친구들이 열심히 문제를 풀고 있는데 나는 멍하니 명상에 잠겨 있었던 모양이었다. 교관이 나를 보고 어디 아픈 데가 있느냐고 낮은 목소리로 꼬치 캐묻는다. 글세 아픈 데는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니 그리면 실습문제 를 풀지 않느냐고 반문이다. 예, 풀겠습니다. 가까워오는 질문에 내가 대답하기를 나는 군복벗기로 지휘관들에게 말씀 드린 바도 있고 해서 학과 공부가 손에 잘 잡히지 않습니다 라고 하니 교관은 생각한 바를 잘해보라는 것이다. 오후 야외시간에 휴식 시간이되어 동기들과 풀 잔디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며,

지휘자란 추워도 추운 줄 모르고 배고파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혁명이다 전쟁이다 하여 지배욕에 발버둥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오늘의 담소내용이었다.

훈련 도중 비가 몹씨 내리는데 온통 비를 맞고 훈련을 받았다. 모두들 비를 맞고도 교육에 임하는 태도가 한국의 건아 로서 장교로서 늠름한 모습이었다.

1966.10.11.(火)흐림:

첫 시간부터 둘째 시간까지 시험을 쳤다. 공부한 것도 없이 시간만 채워보았다. 그것도 일반과목 과 달라서 분석적인 즉 단순 수학적 인 과목 이라 예습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오후에는 또 야외에 나갔다 측지(測地)의 삼각함수 의 대수표(對數表)를 찾으며 열심히 해보았다. 학과를 마치고 나니 포대장(중대장)이 내일부터 동근무복(冬勤務服)을 착용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옷을 서울에 두었기에 이번 추석 휴무기간에 서울 가지 못해 가져오지 못했다. 내일 나는 착용할수 없다는 이유를 설명하니 포병학교 담당 포대장 이 핏대를 세운다. 또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는 책방에 가서 수필(隨筆) 이란 잡지와 세대란 잡지를 구입했다. 머리가 복잡할땐 이러한 책들이 머리를 풀어 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상계를 살려고 하니 10월 호가 아직 나오지 안 했다는 것이다. 세대(世代)란 잡지의 목록이 괜찮기에 구입했다. 오는 길에 빨갛게 익은 감을 몇 개 사서 들고 집에 와서 맛있게 먹었다. 또 다음시간과 내일을 기대하며 시계바늘의 분침과 초침은 무시하고 시침만 따라 가보자.

1966.10.12.(水)흐린 후 오후한때 비:

차(車)를탔다 앉았다 차량의 소리도 요란했다. 학교정문을 거쳐 강의실 앞에 도착 나는 내렸다. 가방 들고 강의실로 들어갔다. 나와서 담배 한가치를 피웠다. 첫 시간부터 5시간 까지 통솔법을 배웠다. 통솔법의 특성; 지식/용기/창의/결단/기지/공정/신뢰/태도/인내/열성/무욕/성실/판단/충성 이러한 것이었다. 교관이 시간중에 성명철학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공명/부귀/장수/빈천/단명/현달/참수/제왕 중에서 감정하면 내 이름은 제왕에 떨어졌다. 정말 형태를 가장한 미신 그것이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 남녀에 관한 이야기 폭소도 터져 나왔다. 학과 후 강당 에서 모든 학생장교들이 전쟁영화를 감상 했다. 그러고 저녁 늦게 집에 들어왔다. 오는 도중 “왕대포집”에서 막걸리 한잔했지, 내 체질이 그러하듯 그 한잔에 온 얼굴이 온몸동아리가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저녁을 먹고 있다가 광주의 충장로 거리에 있는“김”다방에 고등학생의 詩 전시회에 가보았다. 나는 그것을 한참동안 감상 한후 그 학생과 이야기했다. 감상 을 이야기 해달라는 것이었다. 난들 무엇 알아야하지 즉흥적인 감상소감 을 늘어 놓아보았다. 그 학생의 詩도 “金素月” 詩가 그러하듯 20대 전후의 감정이 흘러 넘쳤다. 情에대한 표현으로 가득 찼다. 그러면서도 뚜렷한 시상(詩想)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강조하기를 현대의 허무를 표현하는것도 좋지만 그 안 속에 깊고 강한 용기와 의지를 넣은 시상(詩想)을 구상(構想)한다면 훌륭한 시(詩)가 될 것이라고 순수한 풋내기 견해를 표현해 주었다. 그 학생은 고등학교 3학년 학생으로 꽤 많은 詩를 썼다. 대학은 商學과 계통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것을 듣고 보니 더욱 손뼉치고 싶었다. 완전히 그 詩속에 빠지지 않아서 인지 모르나 나의 지론(持論)은 예술계통은 취미삼아 하는 것을 좋을 것으로 내가 여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학생은 마음이 고와 보였고 무엇인가 생각하는 젊은이였다. 참 인상이 좋은 학생이었다.

1966.10.13.(木) 맑음:

차량행군 으로 꽤 먼 야외 훈련장 에 나갔다. 온종일 조별 실습이라, 나는 나무그늘을 찾아 다른 한 친구와 함께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누어서 수필집을 꺼내어 보았다. 그것을 모두 훑어 본 다음 친구에게 pass하고 다음“世代”란 잡지를 꺼내었다. 비가 오지 안는한 야외시간이 가장 여유있고 재미있는 시간인 것 같다. 학과를 마친 후 집으로 오는 길에 포대장 에게 오늘 저녁 만날시간이 없습니까 하고 여쭈어보았다. 야간교육 이 있어 내일 약속하자고 했다. 나를 조용히 만나자고 한 포대장의 뜻도 대략 짐작이 간다. 명일은 나의 소신을 솔직히 밝혀야지 요즘 어쩐지 전방 원부대로 빨리 가고싶고 그 어린양들 사병들과 웃고 울고 또한 제대 할 때까지 힘껏 인간미 를 베풀고 싶다. 동시에 서울에 계시는 어머님도 보고싶고 형님 형수 조카 모두 보고싶다. 저녁에는 친구들과 더불어 오래간만에 당구큐를 잡았다. 풋내기 70으로 승격 했다. 한팀 친구들이 50으로 초보자(beginner) 덕분에 20차이로 폼을 잡아보았다.

1966.1014.(金)맑은 후 흐림:

강의실 에 강의가 나의 머리 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무엇인가 멍청하게 명상에 잠겼다. 이렇게 되어서는 안되겠는데 하고 반성하면서도 잘되지를 않는다. 오늘 저녁은 포대장 님과 식사를 같이 나누며 나의 퇴교(군복 벗는 문제)를 이야기하고 그 동안 포대장에게 내 학과를 충실이 못했음을 사과 드렸다. 그렇다고 당장 퇴교가 되는 것이 아니다. 포대장의 그 솔직한 인간미의 이야기가 잠깐 군인이란 입장을 벗어나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동시에 술도 권했고 나도 한잔을 마셨다. 포대장이 나의 이야기를 듣고 궁금했든 것이 모두 해명 되었다는 듯 몹시 기뻐하셨다. 나 역시 기뻤다. 그 길로 헤어지고 나는 루네쌍스 라는 다방에서 크라식을 조용히 감상하며 나를 재검토 해보았다. 신청곡은 헝가리 광시곡(狂詩曲) 이었다.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 것 같다. 누구를 기다리는 사람 없는 내가 한참후에는 이상한 감(感) 마저 들어 집으로 돌아와 정소위 / 이소위 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래도록 이야기했으나 무슨 내용들이었는지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1966.10.15.(土)맑음:

다른 날에 비해 오늘은 내 마음 개운하다. 좀 상쾌하다. 학교강당 에서 전쟁영화를 감상하고 퇴근 버스를 타며 나는 생각했다. 내가 좀 명랑해야 되겠다고 실재로 나 자신은 무한한 지식의 빈곤으로 말하기조차 싫었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이해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항상 나 혼자 생각하고 또한 그러기를 원해왔다. 그런데 친구들은 나를 너무 자존심이 세다 는 것이다. 정말 나 자신을 재음미 해야겠다. 염세주의 철학자 “니체” 는 “자존심이 강한자 가 그만큼 열등의식 도 강하다고 했다.” 내가 바로 그기에 해당되는 것 같다. 오늘 나는 저녁차로 서울 올라갈 예정이다. 어머님을 비롯하여 온 식구가 보고싶다. 그리고 나의 겨울 피복(被服)도 가져 와야겠고 서울 가서도 좀 바쁠 것 같다. 이제 교육도 다 끝 날쯤 되었고 나는 동기들 보다 먼저 나갈지도 모르겠기에 옷이며 책이며 서울로 운반해 두어야했다. 이왕 올라가느니 다음 월요일까지 서울에 머물러야겠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정소위 에게 무엇인가 많은 미안한감을 느끼고 있다. 서로 돕고 살아야 삶의 보람이 있겠지. .

1966.10.18.(火)비/흐림:

아침 7시10분 광주역에 도착했다. 마침 소나기가 막 떨어졌다. 그대로 비 맞은 체로 집으로 왔다. 오는 길에 뒤에서 “아저씨 같이 가요!” 하고 초등학생 계집아이가 우산을 받쳐들고 따라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가고 싶었지만 어린아이의 착한 마음을 그대로 팽개칠 수가 없었다. 집에 다 와서 “예야 참 고맙다” 하고 대답했다. 아마도 그 아이 의 단임 선생님께서 착한 일을 하루에 한가지식 해야한다는 교육을 제대로 받은 학생 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집에 와서는 학교갈 시간은 지났고 집에서 그냥 지내고 말았다. 정말 이렇게 방황(彷徨)하는 생활이 되다보니 내 가는 길이 어디며 어떻게 가고 있는지 의문이다. 미래 에대한 보장 도 하나 없이 꿈과 의지(意志)만 가지고 가고 있다. 생활이 말이 아니고 카오스(混亂)그대로다. 내가 사병생활 을 했다면 작년(昨年)에 제대했을 것이었다. 이렇게 걷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었겠지 그러나 갑갑하고 답답하게 여기기 전에 좀 침잠(沈潛)해야겠다. 제대하면 당장 큰 출세를 하는 것 같다. 이것이 나의 허영심이 될지도 모르기에 침착(沈着)한 행동으로 일관해야겠다. 서울만가면 울분이 터지는 것 같다. 그러나 바쁘지만 천천히 가자 란 격언(格言)을 상기(想起)하며 걸어가 보자.

1966.10. 19.(水)맑은 후 흐림:

학교 도착하자 첫 시간에 들어가기 전에 포대장의 인상이 좋지 않았다. 이유는 어제 결석 했다는 이유다. 점심시간을 이용 하여 자진 대대본부에 가서 포대장과 면담했다. 결석 사유를 사전에 이야기했는데도 이렇게 못살게 구는지 술도 한잔하면서 충분히 이해해 주시는 줄 알았는데, 자기보다 차상급자(次上級者)에게 직무(職務)의 高價를 좋게 받고 싶었든지 또는 책임질 일을 두려워했든 것인지? 어쩌면 全羅道 속성(屬性)이 그런 것인지 모를 일이야! 내가 겪어본 全羅道 사람은 다른 地方 사람들에 비해, 좋은 사람 보다 좋지 않은 사람의 비율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우리 초등군사반 의 피교육자 들 중에는 너나 할 것 없이 결석한 학생도 적지 않은데 일부러 괴롭히려는 작정인지 정말 의중(意中)이 무엇인지? 의사(意思)가 통하지 않는 뗑뗑맥힌 사람임에 틀림없다. 바로 저런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이 군대인 셈이다. 하기야 내 자신의 생활이 태만과 허탈 이니까,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문제다. 언제 시간을 보아서 학교장 이나 소속 연대장 에게 직접 면담 해야만 될 것 같다. 우리 포대장은 나를 이해할 그릇은 아닌 것 같다. 그기에 더하여 반성문 까지 제출 하라고 하니, 정말 같은 위관급의 장교를 들볶는 느낌이다. 대학의 냄새도 못 맡아본 위관급장교 계급 대위인 포대장! 그는 나를 형편없이 보지만 내가보기엔 군대계급 대위로서 영원히 못박을 사람이야! 정말 한심한 창고(倉庫)지기 밖에 될 수 없는 사람이야! 그런데 사람 창고(倉庫)지기가 아닌 인사관리로 보직을 맡고 있으니 한심할 수밖에. 모든 것이 귀찮다. 소속부대 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다. 저녁에는 친구와 더불어 집 바깥에 나갔다. 바둑 뚜는 것을 구경하다가 당구치로 가자고 했다. 오랜 시간 당구를치고 돌아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교육기간도 수료하지 못하고 나는 가야만 하는가보다. 나에게 또 획기적인 생활의 변화도 올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친구에 관한 나의 인식>:

친구는 대부분이 이념적으로 의사소통이 되어야 좋은 것. 때로는 그렇지 않아도 동정과 신의에 의해서도 두터워 지겠지 그러나 많이 사귄다는 것은 나쁜 것은 결코 아니지만 자신이 조금 이라도 어떤 목표의의지 또는 향학에있는 처지라면 많은 것이 오히려 방해가된다. 친구를 만나러 다닌다는 것도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현시점의 자신에대한 충실과 무언가 자기 나름대로의 축적 이것이 문제이지 그러므로 데카당스 와 같은 느낌이 들어도 기쁨과 쾌활의 시간을 외면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아직도 시골에서 농사짓고 있는 죽마고우들은 순수자연인 그들 동심의웃음은 천사들의 해맑은 미소와도 같다. 그런 친구들은 많을수록 좋지요. 그들의 웃음이 그리워 그리워 이 詩를 쓴다. 이 詩를 암송한다.

김소월(金素月) 시인 의 “님 과 벗” 을 암송 해보자;

“벗은 서러움에 반갑고

님은 사랑에 좋아라

딸기 꽃 피어서 향기로운 때를

고추의 붉은 열매 익어 가는 밤을

그대여 부어라

나는 마시리.“

김소월 시인의 “길” 중에서 몇 구절 암송 해보자;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공중엔 길이 있어서 잘 가는가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열십자 복판에 내가 섰소.

갈래 갈래 갈린길 길이라도

내개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

황진이 이조시대 의 여류 서정시인의 작품;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임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잊어 울어 녀어 가는고.“

1966.10.24.(月)맑음:

늦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날씨가 봄날인 것 같았다. 아침을 먹고는 휴일기분으로 어디를 갈까 하고 한참 망설였다. 극장에 갈려고 해도 별로 맘 내키지 않고 해서 망설이다 당구를 치기로 했다. 꼭 한 game만 치고는 한소위 와 가만 가만 사직공원을 산책했다. 노래도 불러가며 걷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오후에는 방도 덥고 감기도 풀 겸 낮잠을 잦다. 깨어나니 맘이 가분하다. 오늘은 충분이 내 자신의 시간을 가졌다. 학교만 출근하면 불안속에 사는 것 같아서 푹 쉬고 싶던 참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따분한 날이기도 하지만 나에게 더 이상 기쁠 수 없는 심정이다. 머리도 한층 더 맑은 기분이고 근심도 한결 덜어진 기분이다. 저녁에는 바둑도 두고 당구도 쳤고 산책 도하고 또한 생각에 잠겨 보기도 했다. 보람찬 내일을 기대하기 위해 또 잠을 자며 기다리자.

1966.10.25.(火)비:

오늘이 포병 창설 기념일 인데 우리들을 기념식 에 참가 하라는 것이다. 비가 아침부터 처렁 처렁 내리는 가을비에 그대로 방안에서 지내고 싶었다. 그러나 통근차 도 나오고 해서 결국은 나가고 말았다. 모두들 늦게 출근했다. 사열과 분열 그리고 군악대의 연주가 엄숙한 식전 이였다. 무엇인가 엄숙한 분위기 는 인간의 마음을 겸허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누가 말했듯이 종교의식 은 곧 종교심 이라고 했다. 인간의 마음의 외관인 의식이 그 자체 스스로가 또 다시 인간의 마음을 감화도 시켜주는 모양이다. 요즘의 내 생활이 그렇게 즐겁지도 않고 ,반항!반항!반항!반항! 반항! 반항! 반항! 반항! 이것이 맥이 풀린 느낌이다. 사색/명상 이것들이 무슨 必要가 있겠나 만은 그것을 때때로 저주하면서 때로는 그것을 반갑게 여겨지기도 한다. 될 수 있는 한, 할 수 있는 한 과거 란 사건 을 완전 소각해 보자.

1966.10.28.(金)흐리고 비:

갑자기 날씨가 차가워 졌다. 겨울 같은 기분이다. 더욱이 감기도 들고 해서 더 추운 것 같다. 오늘은 금요일이라 오후에는 하기식을 했다. 이렇게 엄숙하게 하는 것이 국가의식 과 태극기의 존엄성 이 가슴에 깊숙이 자리 잡는 것 같다. 퇴근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차 안에서 모든 학생장교 들이 “존슨” 대통령의 한국 방문 에 관한 이야기가 그칠 줄을 모른다. 뭐! 만 몇 천 원 짜리 침대니 뭐니 야단들이다. 화제는 재미가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 추워서 침구를 깔고 당장 들어 누웠다. 그런데 친구들이 나타나 영화관람을 가자는 것이다. 한참 망설이다가 따라나섰다. 내용이 어떻게 되었든 시각적이 나마 만족을 느껴보자! 기회 가 있다면 자주 가야지 나가는 길인데 바로 그때 대문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내 이름을 말하고 나를 찾는다. 나 역시 그 사람들을 보니 처음 보는 사람들이다. 아마 친구들 이 나를 시험해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966.10.29.(土)흐림:

어제보다는 포근한 날씨다. 4시간의 학과를 마치고 집에 와서는 내일 휴일을 가을 소풍으로 장식해 볼까 하고 고려 중이다. 이제 가을도 다 지나가는데, 이 만연한 가을을 그냥 넘어 갈 수는 없고 그러나 갈 친구가 없으면 부득이 포기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옛날과 같이 그렇게 즐거움을 주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마음이 겉늙었는지 젊은이 같은 폐기가 없어서는 안되겠다. 미래도 중요하지만 알맞은 enjoy도 결코 헛된 시간이라고 볼 수 없다. 저녁에는 많은 친구들이 놀러왔다. 잡담과 농담을 하다 헤어졌다. 그러고 보니 떠들어되는 순간만 즐거웠다.

밤은 달빛이 한달 중 가장 밝은달. “달아 높이곰 돋으샤 어긔야 멀리곰 비춰 오시라 어긔야 어강도리 아으 다롱디리 젼저재 내려신 고요 어긔야 진대를 듸듸올쎄라 어긔아 어강도리 아으 다롱디리.”

1966.10.30.(日)맑음:

계속되는 포근한 날씨였다. 아침 9시경 친구들과 가을 단풍구경으로 백양사 가는차를 탔다. 백양사에 거지반 다 와서는 차에서 내려서 걸었다. 단풍은 물론 이거니와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달렸고 근처 마을은 온통 감나무로 들러 쌓였다. 그 광경이야 말로 전통민속 의 스펙터클 한 장면 이었다. 백양사절 나는 처음 구경했지만 매우 큰 사찰 이였다. 구경할 것도 많았다. 그 주변에는 장구에 장단을 맞추어 춤을 추는 사람, 그걸 본 나도 어깨춤이 들썩들썩 하기도 했다. 또 젊은이들은 재즈 음악 털어놓고 난장판이고, 우리 일행도 덩달아 술을 마시기도 했다. 좀 떠들고 놀았더니 술에 약한 나는 머리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이다를 마셔도 풀리지 않았다. 그 뿐인가 버스 칸에서는 고등학생들이 떠들어되는 바람에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웠다. 그들은 이따금 지나친 저속한 노래를 고함쳐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주위에는 그들을 나무라는 어른이 없었다는 것이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유와 방종 그리고 자율 이것을 잊은 젊은 세대는 방종이 아닌가?

1966.10.31.(月)맑음: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학과시험 도 그렇게 지루하지 않았다. 온 산야가 금빛의 곡식이요 붉은 단풍들로 둘러 쌓였다. 거기다가 고요하기 한없는 날씨 이쯤 되고 보니 가을날씨도 극치에 달한 감이 든다. 10월의 Calendar 도 하염없이 떨어지고 앞뜰의 나뭇잎들도 분홍빛으로 갈아입고는 한 잎 두 잎 떨어지고 있다. 계절의 임무를 마무리 하는지? 오-헨리 작가도 이러한 Scene을 보고 테마가 떠올라 “최후의 한 잎” 이란 작품을 남겼는지 모를 일이지. . . . 저 잎들이 모두 떨어지고 저 들판의 곡식들이 모두 베어지고 살아져도 나는 그대로 있겠지. 또 철이 되면 저 들판과 저 산에 하얀 눈송이가 가득 할 때가 오겠지 그리고 봄이 되면 진달래가 피고 벚꽃 이 참지 못하고 폭발 할테지. 슬픔이 가면 기쁨이 오고 그 기쁨이 오면 또다시 슬픔을 인계 하고 이렇게 저렇게 하여,

오늘도 인생은 강물처럼 방향을 확실히 모르고 흘러 가는가보다. 하지만 물줄기가 가늘게 쫄쫄 흐르는 강물은 보기에는 낭만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흘러내리다가 모두 모래속에 소리없이 살아지고 말겠지! 그러나 엄청난 홍수를 만난 것 같이 도도하게 흘러내리는 강물은 웅장한 바다와 파도를 만날 약속이나 한듯 확실한 방향을 정하여 도도하게 흘러가겠지!

1966.11.1.(火)맑음:

오늘은 10월의 Calendar와 작별을 고했다. 또한 소위 계급장 도 작별을 고했다. 우여곡절끝에 내가 중위로 진급 했다. 이것은 내가 중간에 퇴교 시간 늦추기와학과공부 성적을 조절하여 교육 도중에 진급하고 결국은 제대하기위한 나의 학과시험 의 점수조절 로 되었으며, 계속해서 같은 방법으로 퇴교까지 밀어 부칠 셈이다. 나쁘게 보면 교묘한 처사 지만 내 자신으로 보아서는, 파면 당할지 모르는 공포와 명예제대 를 유도해야할 초조감의 불안속에 행해진 불가피한 처세였다. 내가 대한민국 육군 포병 중위로써 합당한 자질이 있을까? 솔직히 내 자신에게 자문자답 해보면 나는 자질은 있다고 힘주어 대답하고 싶다. 현재는 꿈과 의지 때문에 갈등에 처해 있지만, 국가를 위한 봉사방법 은 다양하다고 본다. 지금은 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내 몫은 반드시 그 이상 초과달성 할 것을 굳게 내 자신에게 맹세한다. 우선 내가 원소속부대 에 귀대 하면 나의 충심과 충실을 마음껏 보여주고 깨끗한 마음으로 군복을 벗어야지 군계급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겐 관심이 가지 않는다. 나는 그기에 앞서 말할 수 없는 고민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보잘것없는 인간이다. 이 무지와 무지의 초라한 나를 진실로 알았다면,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이 어떤 면에선 엄청난 괘도이탈이다. 다시금 나를 찾고 새로운 갈 길을 찾고 생활을 무디게 하며 끝없이 성실을 가져보자. 인생도 한갓 도박이라고! 어떻게 보면 그럴지도 모르지 뚜렷한 실력 없는 내가 경쟁에 나서자니 까마득한 느낌도 든다.

1966.11.2.(水)맑음:

맑은 날씨였다. 오전엔 필기시험 오후엔 장애물 실기시험 을 쳤다. 동기 들은 진급했다고 진급주를 지휘관들과 한 좌석에서 시간을 가지게끔 하자는 것이다. 반대하는 동기도 많았으나 결국 다수결의 표결로 진급주를 내기로 결정했다. 계급장 을 달아주고 사주고 give-and-take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동기들이 한 좌석 을 함께 한 것은 이번이 입교(초등 군사반 과정) 후 처음이다. 전례로는 나는 항상 빠지는데 소질이 있지만 이번에는 내가 오히려 뒷면에서 서둘러 보았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해결이 잘 안 된다는 것은 일단 유사시 에 다른 일도 마찬가지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강력히 추진 해 보고 싶었다. 저녁을 먹고는 방에 앉아 6장의 편지를 섰다. 나는 편지를 한번 쓰면 한몫 쓰는 버릇이 있다. 따름 따름 쓰기는 싫었다. 그러니 어떤 때는 하나의 단편소설 이 되기도 한다. 나는 우정의 대부분을 편지로서 이어왔다. 그것이 젊은이의 시간조절 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된다.

1966.11.3.(水)맑음:

오전에는 실외훈련 오후에는 야외훈련 에 나갔다. 차를타고 가며 동기들은 잡담과 만담시간이 돌아온 것 마냥 떠들고 야단들이다.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야 여자 이야기 밖에 없는 것 같다. 호기심도 나고 알아야할 것도 있었지만, 허구한날 그런 화제 뿐이니 물론 인간들이 하는 유희장난 이지만 여러 번 들으면 실증이 난다. 좀 외면 하고싶다. 저녁에는 우리 동기들의 진급파티를 열었다. 교육받는 장교 약50명과 20여명의 동기들이 참석해서 간단한 식사를 나누었다. 파티가 끝나고 동기들만 남아서 별도 시간을 보냈다. 참 뜻 있는 일이었다. 모든 일 처리는 차분히 진행되었고 사고도 없었다. 당구 한 게임 치고 집으로 왔다. 내 한방에 있는 정중위는 다리가 아파서 참석을 못했다. 어떻게 나 혼자만 기쁜 날인 것 같았다. 정말 오랜만에 가져보는 기쁨이었다.

1966.11.4.(金)맑음:<나의 思母曲>

오전 8시부터 저녁 12시까지 훈련이다. RSOP훈련이다. 나도 무장을하고 함께 나갔다. 포를 직접 움직이기도 하고 사격 까지 하니 매우 힘이 들었다. 어떤 분은 우리 피훈련 장교 한 사람을 퇴교 시킨다고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려된다. 특수사회인 군인생활 이 그러하듯 황제같은 기분으로 덤벼들었다.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젔다. 또한 그 피훈련 장교는 얻어맞았다. 결국은 피하며 항의했다고 또 불려갔다. 지나친 위신을 찾는 것 같다. 그러나 그보다 더 핵심적인 문제는 군대는 장사병 할 것 없이 대부분이 무지하고 무식하다못해 인격은 온데간데없고 저질인 군인이 많다. 자신의 부족을 은폐하기 위한 저질행동이 다반사다.

저녁에는 매우 추웠다.

배도 고프고 춥기도 하고 어머니 생각이 난다. 집에 같았으면 내 어머니가 뜨거운 사탕 물에 달걀을 풀어 넣고 한밤中에 잠도 없는 모양, 내방에 들고 왔어 권했을 때, 괜찮다고 내가 한사코 거절해도 “뜨끈뜨끈 할 때 마아 묵어라카이(먹어라 하니까)” 하며 애타게 간곡히 권했을 게다.

그런 엄마가 보고싶고 농담과 장난을 건 시간들이 내 머리를 스쳐간다. 상상만 해도 비교 할 때 없는 즐거운 순간이다. 내 어릴때 불러주는 이름이 수달이 였다. 모두들 “달아”라고 불렀다. 엄마는 심심하면 나를 보고 부르는 노래가 ”달아달아 밝은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를 사랑과 장난이 가미된 노랫말을 불러주곤 했다.

내 어머님은 크나큰 산(山)이라오, 내 아버님은 그 산사이로 흐르는 계곡의 맑은 물이라오, 퇴계(이황)선생께서는 산(山)은 인(仁)이라 하셨고 물(水)은 지혜(智慧)라 하셨지요. 내 어머님은 크나큰 자애로움 대인자(大仁慈) 인자한 크나큰산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오! 너무나도 크나크시고 너무나 위대하신, 내 어머님! 이 못난 자식을 끊임없이 챙겨주시고 자애를 베풀어주신, 내 어머님! 11남매를 똑같은 사랑으로 감싸주신 지독하고 엄청난 자식사랑을 신앙으로 살아오신 내 어머님! 몹시도 몹시도 보고싶군요.

아무도 어머님의 한(恨)을 풀어주지 못한 우리들 불효자식들을 용서해 주소서! 언젠가는 어머님의 그 3가지 恨을 풀어줄 자손/손자들이 반듯이 기어코 나오고 말 것입니다. 오! 나의 어머님! 생각만 해도 너무나 크옵니다.

<思母曲>

호메도 날이언 마라는

낮같이 덜리도 없어니이다

아바님도 어이어신 마라는

위덩더둥셔

어머님 같이 괴시리 없세라

아소님아 어머님 같이 괴시리 없어라.


1966.11.10.(木) 맑음:

오늘 나는 정신훈련 시간에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대강당 에서 여러 동기 및 선배장교님들을 앞에 두고 이렇게 주어진 시간에 연설을 해보았다. 내 나이 24세였고 학교측의 숙제이자 그 나이에 나의 독서를 정리하는 시간이기도 하여, 숙제를 충실히 해온 셈이었다. 한편 이 기회에 군에 대한 불만의 핵심을 간접적으로 폭발시키고도 싶었다.

“ 다 음 ”

제목: <한국사회에 우리세대가 리-더(Lead)해야할 좌표 는?>

“이 시간 저가 선배장교님과 현명하신 동기들과 후배장교들을 앞에 두고 안하무인격으로 이렇게 올라서게 됨을 여러분의 관대를 빌어 마지않는 바입니다. 저가 평소에 느껴온 사상을 다른 젊은 지성인 들에게 얼마나 호흡이 되는가를 알고싶고 동시에 예리한 비판을 받고 싶어 이 시간의 기회를 얻고 싶었든 것입니다. 저가 지금 끄집어내려고 하는 제목이 과거 혹은 현재에도 많은 지성인들이 부르짖어 왔던 소리를 나 자신의 idea를 반영하여 재삼외치고 싶어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흑판에 제목을 쓴다). 이 논제가 어떤 권위를 가진 분에 의하여 나왔다면 여러분의 관심은 달라 졌을 것입니다. 마치 “존슨” 대통령이 “하와이”의 환영군중속의 한 처녀의 이마에 Sign 해준 것이 그렇게도 유명했는데 그 이마에 저가 Sign 해주었다면 세평은 정반대의 여론이 나왔을 것입니다. (헤밍웨이의 무명시절 파리에서 이야기 삽입) 그럼 먼저 우리 나라의 역사를 더듬어 봅시다. 과거 삼국시대의 고구려때 19대 광개토대왕 과 장수왕때 만주의 요동 반도까지를 확장한이래 아직 그 이상 영토를 넓히지 못했으며 지형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항상 외침에 허덕였고 위로는 만주, 옆으로는 일본, 오늘날에는 밑으로는 미국이 간접적인 식민지화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려됩니다. 좀더 종교를 모독하는 말로서 표현한다면, 성경에서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한 구절 속에 인간의 마음을 겸허하게 만드는 가운데 세계문명주의 와 더불어 그 속에 미국의 맘모스 한 위대성을 이 민족에게 가득 부어 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우리는 한번 가져볼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배달민족에 생을 향유한 우리는 좌표를 어디에 찍어야 직선이(Y=ax)될지 아니면 포물선이(Y=ax2)될지 신중한 발걸음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내로는 이조의 사색당쟁으로 인하여 결국은 36년간이란 긴 세월동안 우리 나라의 학문이 中止된체 왜놈의 식민지가 되어왔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 아닙니까. 이러한 세월의 흐름 속에 우리 민족성은 외란에 지치고 또한 내란으로 지쳐서 믿어야할 신(神)을 잃은 것이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말의 낱말을 하나 분석해 봅시다. “ 까마귀가 운다”, “종달새 가 운다”, “ 귀뚜라미 운다”, 라고 한 이 “운다”라는 동사를 표현하기 좋아하는 이유가 이 배달민족의 눈물을 단면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이 아닙니까. 영어에서는 " birds sing"(새들이 노래한다), “Ting a ring Ting a ring went the bell"(띵아링 띵아링 종을 쳤다), 라고 한 표현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그러면 우리 나라 동양인은 서양인의 사상과 그 차이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나변에 존재하는가) 분석해 보기로 합시다. 철학자Stalay 는 행복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수학공식처럼 표현했습니다; 행복==욕망 분의 소유 라고 했는데 여기에 동양인은 소유는 적고 욕망은 크기에 내심으로 그 욕망을 자율이나 타율로 축소해 왔든 것입니다. 그것은 정적이요 명상적이요 소극적인 사상이 되었습니다. (이조시대 시인 정극인 의 불우헌집의 상춘곡 끝구절 인용) 그기에 반하여 서양인은 갖은 근면 과 노력으로 소유를 채웠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양인의 사상은 동적이요 진취적이요 적극적인 사상을 갖게 되었든 것입니다. 그 예로서 여러분이 잘 아시는 미국의 개척역사가 Frontier정신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Frontier정신으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었고 미국의 35대 케네디 대통령이 새로운 발전, 새로운 소유, 새로운 도전을 기도 하려고 New Frontier 정신을 미국민(아메리칸)을 향하여 맹렬히 부르짖고 있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 나라의 사상은 어떻게 흘러 왔습니까. 이것은 좀 학술적인 이야기 가 되겠습니다만(일본의 중촌원 교수 이야기 삽입). 여기에 반박할 학술자료가 희박 하다는 것입니다. 하기야 우리 나라도 고유의 사상을 캐낸다면; 원효대사, 李퇴계, 李율곡 사상을 들 수 있습니다만 이것을 체계화 세우고 현대화한 학문 또 더 발전된 학문으로 연구하지 못한 것이 우리 선조들이 후손들에게 미안하게 여겨야 할 이야기들입니다. 오늘날까지 후손들에게 물려준 것이 이토록 눈물과 빈곤뿐 이었지 않습니까. 그것도 우리 나라의 피치 못할 배달민족(倍達民族) 이 아닌 배달민족(配達民族)으로 방황하다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여겨지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이러한 과거를 과거라고만 돌릴 수 없습니다. 대영제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씨가, 왈(曰)“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과거를 과거라고만 볼 수 없다.” 고 했듯이 우리는과거를 그 어느 때보다도 새롭게 깊이 음미해야 될 때가 왔다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미래를 푸른 잔디 위에 새로이 밟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는 세계의 두 사상 두 이념을 휴전선이란 가느다란 줄을 그어놓고 민주주의 대 공산주의 의 시선을 집중 시켜 밤낮으로 무슨 이유에서 인지, 날카롭게 쳐다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우리민족이 세계의 두 사상 과 이념을 代辯서 용감히 인류사랑의 희생정신에서 이렇게 겨누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세계의 어느 민족보다 우리는 선민(Elite)의 민족이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하기야 민족 이란 단어도 19세기 후반기에서부터 신을 잃고 국가를 잃은 사람들이 그들민족의 좌표를 설정하여 잃은 집단의 사람들을 재규합과 제규합하기 위해 새롭게 부르짖는 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는 많이 달라져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이란 이념은 그대로 존재해 가면서 내용적으로는 국가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을 위해 서로 닮아 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쏘련 에서도 소리 없는 혁명이라 해서 수정사회주의가 나오고 민주주의에서도 수정자본주의가 더욱 두각을 나타내면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쏘련내 에서는 경제학자들 간에 산업에 있어 생산자와 소비자간에 중계 상인이 있어야 한다는 자본주의의 경제이론을 따르자는 자와 그것을 반대하는 이론가들 사이에 많은 논쟁을 벌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금 자본주의 대열에 열을 맞추어 가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도 산업개발에 있어 경제성장 에 치중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반비례로 경제안정이 잘 되어 있지 않은 것은 내자조달(세금을 많이 내라고 하는것)을 과거 어느 때보다 국민들에게 많은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경제이론에서 보아도 경제성장 과 경제안정은 병행되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시골농가에서 해마다 “논”을 사고 “밭”을 사는 집에 때때마다 의 식사(밥상)가 다른 반찬은 없고 한정된 반찬 “된장국 과 꽁보리밥” 뿐이라는 것과 마찬가지 의 해석이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정부에서는 올해부터 더 일하는 해 라고 했지 않습니까. (대기업 과 중소기업에대한 설명, 서양사 의 길드조직 삽입). 우리 세대는 다시 후손들에게 더 이상 빈곤과 눈물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 과거 어느때 보다 부담많은일 부담이 많은 건장한 고민을 해 보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서양격언 “건전한 정신은 건강한 신체에 있다” 라고 한 것을 “ 건강한 신체는 건전한 정신에 있다” 라고 정신 의 중대성을 더 강조 하여 도치적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현대철학은 세기전 의 “탈레스,쏘크라테스, 플라톤” 의 관념론을 거쳐 독일 “헤겔” 의 관념론과 영국 “베이콘” 의 경험론을 거쳐 미국“죤듀이” 의 프래그마티즘에 이르고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키케르케골”을 창시자로하여 “싸르트르”에 이르기까지 실존주의 가 널리 파급 되고 또한 파급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실존주의가 대두된 것도 19-20세기사이 신 이 인간을 외면했다고 해서 시작 되었고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은 아무리해도 인간의 힘이 부족한데 대해서 시작 되었습니다. 이 실존의 실은 성실과 진실과 현실의 적응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아놀드 토인비”역사 철학자가 지적했듯이 오늘날의 인류의 적이 바로 인류 라는 결론이 나왔기에 더욱 그 부르짖음이 우렁차게 되었습니다.(산꼭대기에서 부르짖는 메아리 소리 이야기 삽입). 여기에 인간은 두려움을 다시 가지고 “나” 자신 만이 아닌 군중속에 내가 있어야겠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고 군중속의 나의 성실과 진실과 현실의 적응을 더욱 필요 하게되었습니다. 이러한 개념에서 “나(我)” 란 대명사를 위 하다가 보면 그 가운데 국가에 대한 충성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 아닙니까. 오늘의 우리 나라의 젊은세대 들은 희망과 이상을 꾸려보다가 호구지책에 급급하여 결국은 “앞집에 김서방/ 뒷집에 박서방 이 되어, 이 보오! 구공탄 찍으려 가세, 예! 그럽시다” 하고 외치게 되는 것이 거반 90%가 아닐까 합니다. 나머지 10% 는 눈물겨운 혈전의 장소 에 나서야 할 처지입니다. 요즘 우리 나라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우려해서 산아제한에 대한 운동이 조직화 되어가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대 민족적인 견지에서는 찬성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민족이 세계인구의 비율에 얼마가 된다고 이렇게 소극적으로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도 개척정신으로 어디 한번 나가봅시다.(일본의 브라질 이민 이야기 삽입) 현대사회의 윤리는 더욱 혼란에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괘테의 파우스트선생과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의 이야기 인용). 여러분 밤이면 시내 번화(번화)가에 스텐드-빠에서 “빠 걸”이 “여보소 손님! 무슨 그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하세요 다시없는 이 밤을 마음껏 즐깁시다.”라고 하는 이 말을 재음미해 보십시오. 여기에 현대의 여론과 광고시대 및 분업에 한정된 이야기(실존주의 철학가 야스퍼스 의 이야기 그리고 아담 스미스의 분업적인 인간이 되는 과정 이야기 삽입) 라고 했습니다. 프랑스 의 실존주의 문학가 까뮤는 그의 작품 “이방인”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 몽빠르나스 묘지에서 훔쳐온 꽃 인줄 알면서도 그 노파에게서 꽃을 사 주는 것을 항상 해왔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현대는 다시금 옛날의 인간애 가 몹시 그립고 아쉬워 지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한국 젊은 세대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업에 많은 고민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북으로는 괴뢰(북한), 서로는 중공, 동으로는 일본, 그리고 밑으로는 미국, 여러분! 같이 호흡해 나가야할 한국 젊은 세대인 우리는 투철한 눈초리로 상황을 잘 판단해 봅시다.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가 나포레옹 군대에 패배한 프러시아(독일)국민 에게 告 했습니다. 무어라고 “오늘 우리는 나포레옹 군대가 강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이 약해서 패했습니다.” 라고 했듯이 독일의 라인강의 기적이 아니라면 우리가 이렇게 못사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발걸음은 과거 어느 때보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신중하게 또한 세심하게 밟아 나가야 할 시기입니다. 이 한 걸음 한 걸음의 좌표를 여하히 밟느냐에 따라서 Y=ax(직선)의 길로 가느냐 혹은 Y=ax2(포물선)의 길로 가느냐에 대한 역사의 판단을 받을 기로에 우리가 서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다시금 역사의 거울 앞에 옷깃을 여미고 더욱 용기차게 나가봅시다. 감사합니다. 보잘것없는 이야기를 이렇게 잘 경청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연설 끝-

나는 이날 뜨가운 박수 를 아낌없이 받았다. 시종일관 청중(장교님)들의 중간중간 박수들은 나의 독서 와 나의 사상의 표현에 무한한 자신감을 가지게끔 했고 대부분의 청중(장교님)들은 마치고 난 다음 나의 주위를 둘러싸고 나의 독서와 나의 사고를 경탄에 맞이 않는 찬사를 아끼지를 않았다. 그 이후 포병학교내 교수단의 높은 분들은 물론이거니와 나의 직속상관 대대장 께서도 저를 초청 하여 독서에 관한 것 과 시국문제에 관한 토론을 다정하게 제의하여 주셨다. 그 이후 많은 장교님들은 빈번하게 세상만사 의 매사 에 그들의 인식들을 대비하여 나의 견해에 대한 질문과 식견을 타진해 왔던 것 이었다. 나는 일상생활에서 의 나의 번민과 나의 선택을 정리 해 나가는데 적지않은 긍지와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 이었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이 나이에 나를 중간점검 하는데, 고뇌하는 나의 사고가 실망 스럽지 않은 밝은 전망을 암시해 주는 것 이 었다. 앞으로도 나의 번민과 나의 선택 의 전개가 헛된 의문으로 끝나지 않겠구나 하는 강한 집념을 가지게 되었다.

1966.11.11.(金) 맑음:

무언가 기분이 상쾌한 날이었다. 학교에서는 학과를 일찍 마치게 해주었다. 입교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포대장도 전일과 달리 최대의 관대 를 베풀어주고 있다. 어제 의 내 연설에 동감한다는 뜻도 있을까. 아무튼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고 오는 길에 이발을 했는데 Service 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이발을 마치고 친구와 함께 폭소의 얘기를 나누기도 하며 집으로 걸어왔다. 저녁을 먹고 조금 있으니 Korea Herald 영자신문 배달소년이 신문을 갖다놓으면서 신문대금 수금하러 왔다고 했다. 참 착한 학생이었다. 나는 신문대금과 함께 공부할 노-트를 구입하라고 몇 푼을 더 보태어 주었다. 그 학생은 말은 없어도 감사의 눈웃음을 나에게 던져 보냈다. 생존경쟁에 살벌한 현대에 휴매니즘이 몹시 아쉬운 것 같다. 나는 오늘 시종일관 기뻤다. 낭비보다 저축을,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고 크게는 국가를 위하는 길이다. 저녁에는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 와 나의 피아노 선생인 주인 딸과 “징키스칸”이란 영화를 감상했다. 이때까지 나를 가르쳐준 보답을 무엇으로 메울까 궁리하다가 영화를 보여주기로 했든 것이다. 오는 길에 감홍씨와 능금을 사 가지고 집에 남아있는 식구들에게 나눠주었다.

1966.11.12.(土)흐린 후 비:

오전에는 시험을 쳤고 오후에는 시국강연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일찍 돌아왔다. 졸업은 가까워 오지만 나는 언제 나갈지 몰라서 불안의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 오늘에야 내가 나간다는 것 확정 되었다. 즉시 나는 집으로 왔다. 자형의 동생이 집에 오기로 했기에 기다렸다. 방 청소를 하고는 그대로 누어서 낮잠을 잦다. 그런데 기다리던 손님은 아직 오지 않았다. 저녁 식사후에는 바깥에 나갔다. 막상 나가보니 뚜렷이 갈 데는 없었다. 친구집에 갔더니 친구도 어데 나가고 없고 해서 책방 에 가서 책이나 몇 권 살가 하고 뒤적거려 보았다. 내가 생각하는 책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다방에서 차를 마실까 하다가. 그것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당구장 에 들였더니 친구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그곳에서 한참동안 구경하다가 집으로 왔다. 방안에서 명곡집 을 꺼내어 놓고 노래를 불렀다. 신문도 보다가 책도 보다가 이러한 번뇌의 자유시간속에 일찍 잠이 들었다.

1966.11.13.(日)비:

아침에는 교회 에 나갔다. 번뇌를 다소나마 풀기 위해 정신적인 안정을 찾기 위해서였다. 점심 때 는 혼자 막연히 쉬다가 다른 친구 집으로 놀러갔다. 그 기 몇 놈들이 모여 이야기하다가 술집으로 가서 술을 마셨다. 대부분이 광주에서 사귄 여자들이 그 친구를 찾아왔기에 모두 뿔뿔이 헤어지고 나는 조금 있다가 나 혼자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배가 고팠다. 늦은 저녁이나 밥을 달라고 하여 한 그릇을 거뜬히 치워버렸다. 그 시간에 또 다른 친구가 찾아왔다. 조용한 담소를 나누다가 헤어지고 일찍 잠을 자기로 결정했다. 아무튼 무엇인가 젊음을 재음미하는 시간들이었다.

1966.11.15.(火)흐림:

비가 온 뒤의 쌀쌀한 아침이다. 오전에는 사격지휘 를 배웠고 오후에는 군인 복무규율 시간과 자아의 시간 이었다. 군목의 정신훈련 시간이었다. 진실된 자기와 가식의 자기를 구별 해 놓았다. 인격은 곧 위장한 자기 라는 것이다. 어느 책에서도 보아온 이야기들이다. 지금 군인장교들에겐 이러한 교양실력 이 무척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독서 한 것도 없으면서 벌서 독서의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책을 보던 안 보던 괜스레 잠이 오지 않는다. 12월도 가까이 오고 해서 내년계획도 세워야 할 것 같다. 올해는 그야말로 바쁘고 혼란된 날들이었다. 부질없는 꿈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나는 새롭고 특이한 삶을 위해 다른 사람이 평범하게 가는 길을 투쟁의 연속으로 어렵게 가고 있다. 이대로 갈 수밖에 없고 쉴 수도 없다. 어려운 역경속에서도 꿈을 못 버리는 소년/소녀의 가장처럼 부득이 이대로 가야한다. 급박한 현실 앞에서도 내 사상을 번창 할 수 있는 곳을 찾고 또 만들어 가야한다.

꿈과 현실 그리고 이 바쁜 중에 이성(異姓) 까지도 챙겨 가며 번거로이 달리는 “이도희“의 인생이 어디에 도착할지 모르고 물길 따라 급류로 굽이굽이 흘러가고 있군! 그래도 작은 물줄기 처럼 촐촐 흐러는 낭만적인 물소리는 모래밭 속에 스며들어 살아지고 말기에 그런 낭만을 마다하고 마치 대홍수를 만난 흙탕물과 함께 뒤범벅이 되어 그 나름대로 웅장한 강물과 뒤엉켜서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군! 광활한 푸른 바다 와 우렁찬 푸른 파도와도 급히 만날약속이나 한 듯 성급하게 흘러가고 있군!

1966.11.16.(水)흐리고 비:

옷을 툭툭하게 입고 학교에 나갔다. 아마 추울 것 같아서 끼워 입었다. 오늘은 평일과 같은 지루한 날은 아니었다. 내일은 OBC 과정 의 마지막 종합시험 이라고 하나 그렇게 관심이 나에겐 없었다. 듣기만 해도 괴로운 것이었다. 그러한 현실의 억지 무관심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가끔 이런 문제에 관하여 충고를 많이 받아왔다. 하지만 내가 제대해야 한다는 마음은 소위 임관 하기 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내가 내 생애에 가장 자신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했어 그것에 대해 돌진해도 경쟁에 이길까 말까 하다. 영어에 이런 말이 있지;

"I will concentrate on my good traits, not my bad one; 나는 내 결점보완 보다 내 장점에 전력을 집중할 작정이다.“

요즘의 내 심정은 바로 이러한 생각밖에 할 수가 없다. 졸업(수료)을 얼마 앞두고, 이러한 문제를 요리하느라고 많은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에 와서는 나 혼자 방법을 모색해 가고 있다. 그렇게 하니 더 이상 물의가 일어나지 않았다. 집에 와서는 세수를 하고 저녁 7시경 밖같에 나갔다가 8시에 돌아왔다. 오늘은 답장도 없는 편지를 또 몇 자 긁어서 보내려고 한다. 전일의 나의 편지가 어떤 파문을 일으켰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한끼의 식사 상(床)에는 밥 과 반찬에는 영적인 꿈과사랑 을 함께 먹어야 옳바른 건강을 찾을수 있고 그러한 구성의 식사메뉴가 올라와야 한정식이 될 것 같다. 나는 미래에 그러한 메뉴를 차릴 수 있는 가정을 꾸려 갈려고 한다. 그러나 이성의 관계가 요즘과 같은 번뇌를 가져오지 않고 변함없이 계속 된다면 자신의 학문과 진로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참 아쉽다. 그것도 질투와 경쟁이 있기에 훨씬 더 어렵겠지. 따지고 보면 그러한 이성(異姓)에 대한 애정(愛情)의 진실은 30%의 안정(stability)과 70%의 불안정(unstability) 이라고 하는데, 시간이 절대 부족한 사람들에겐 밀고 당기고 하는 것이 골치 아픈 프로젝트의 프로그램 이므로 과감히 포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더 크나큰 사랑사업 위하여 훨훨 털어 버리고 떠나야한다. This is my vision of loveliness.

톨스토이 의 에로스 사랑에 대하여:

1)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 “사랑“ 이다.

2)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사업은 무엇이냐? “사랑하는 사업” 이다.

3)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냐? “이 순간에 우리가 접하고 있는 사람“ 이다.

1966.11.17.(木)흐림:

아침에 늦게 나가고 저녁에는 일찍 돌아왔다. 방 청소를 좀 했다. 그리고는 한방의 동료가 아직 오지 않았기에 크다란 종이에다 나의 행선지를 적어두고 영화관에 갔다. 집에 돌아오니 다들 와 있는 모양인데 아무도 모이지 않았다. 나는 잠자리에 누어있었다. 조금 후에는 술을 마셨는지 왁자지껄 떠들어 되며 다들 들어오는 것이었다. 나도 저렇게 무아경지(無我境地)속에 호탕하게 즐겨보자. 기뻐해 보자. 젊음을 젊음답게 지내보자. 외쳐보자 터져라고 외쳐보자. 나는 때때로 너무 노장 같다는 별명을 듣기도 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바로 보는 솔직)한 충고인 것 같다. 모름지기 젊음은 젊음답게 할 수 있는 여유만 있다면, 주저 없이 즐길 줄 알아야 한다. 다시는 노인(老人)같다는 별명을 듣지 않고 싶다. 모든 것을 수용할 줄 아는 여유 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고 큰소리로 외치고 싶구나.

1966.11.20.(日)비와 눈:

오전에는 전라남도의 문화재라고 하여 친구 셋이서 운동장 에 놀러 나갔다. 교회에 갈가 하다가 발길 가는 대로 간 곳이 운동장 이었다. 사람들이 많고 복잡한 것이 왠지 싫었다. 가자마자 돌아온 셈이다. 저녁에는 눈이 내리었다. 비가 올 줄 알았더니 하얀 白雪이 나리는 것이었다. 방문을 열고는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저녁에는 해롯大王 이란 영화를 감상했다. 내용은 오셀로 와 비슷했다. 한 사람의 음모와 증오로 한 국가가 파탄으로 이르고 말았다. 또 하로가 저물었다. 빨리 잠을 청해보자.

1966.11.21.(月)눈:

눈이 아침부터 펑펑 쏟아진다. 나는 오늘은 학교에 가지 않고 내일부터 3일간 집에서 쉬기로 결정 했다. 어제 저녁부터 조금씩 온 눈이 보기 좋게도 온 들판을 뒤덮었다. 날짜는 점점 겨울쪽으로 가고 있었다. 학교 출석만 하고는 일찍 집으로 왔다. 낮잠을 한숨 자고는 오후에는 “성서에 나오는 여인상” 이란 책을 빌렸다. 이 책으로 마음을 조용히 가져보자. 이제 광주생활을 마감할 일자가 5일밖에 남지 않았다. 어떻게 학교 교육생활 동안 교육과정의 직속 지휘관 인 포대장과 퇴교문제 때문에 승강이 벌린 것이 영영 잊혀지지 않고, 오싹하게 머리에 떠오르고, 더욱 한방에 요즘 셋 사람이 기거하고 있으니 놀러 다니는 것이 태반의 일과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몸서리나는 교육 이었다. 하기야 불충실로 내 자신이 그릇된 행동으로 일관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런 대로 할 말은 많았다.

1966.1122.(火)맑음:

평일 아침 보다 잠을 많이 잤다. 식사도 좀 늦게 하고는 그대로 방안에서 지냈다. 점식 식사직전에 피아노를 좀 만졌다. “한 떨기의 장미꽃” Irish air 작곡 매우 조용하고 평온한 밤의 노래 같기도 했다. 그 노래와 같이 나의 두뇌 도 순간 이나마 평온하고 싶었다. 피아노 건반의 중간 “도”가 고장인 것 같았다. 음정이 고르지 않고 괴짜 소리가 난다. 날이 추워서 손가락이 차가웠다. 오후 2시 에는 “李인수” 란 친구와 르네상스 다방에 나가서 음악을 감상하며 milk를 마셨다. 보통 평일에는 나는 커피를 마시곤 했는데, 그 milk 맛이 생각한 것보다 괜찮았다. 음악 감상이란 미명아래 다방 출입이 자자한 것은 좋은 현상은 못된다. 음악감상도 한가한 예술인이 생의 전부로 하는 것, 그 밖의 사람들은 취미삼아 가끔 듣는 것이 좋을 것. 담배 이것도 좋은 것은 아니다. 번뇌와 명상에서 무엇인가 허전하여 가까이 하지만, 아직 갈고 닦아야 할 나이에 , 좀 중지 해야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1966.11.23.(水)맑음:

어제까지는 추웠는데 오늘은 제법 포근한 날씨였다. 오전에는 Room-mate 들과 청소 와 세탁 을 하고 오후에는 함께 뒷산을 거닐어 보았다. 내려오면서 방송국 을 들렸으나 그곳에 근무 하는 친구는 광주땅에서 유일한 고등학교 동기 이었다. 그런데 마침 자리에 없었다. 그 길로 당구장 에 가서 당구를 오래도록 쳤다. 마치고 나오니 저녁때가 조금 넘은 것 같았다. 세 사람이 식당에 가서 떡을 좀 사먹고 집에 와서는 또 저녁을 황급히 먹었다. 그런데 방안에 남아있든 정중위가 여자친구 둘을 데리고 와서 약 3시간 동안 무엇을 주절 되었는지 이야기를 하고 저녁 8시경에는 우리들 4명이 여자들 4명과 르네상스 다방 에서 좌담회 를 갖자는 것이다. 그러던 중에 한 친구가 여자 차림을 하고 가장행열처럼 화장도 하고 또 다른 친구도 여자 차림을 하고 다방 에 유유히 나갔다. 손님들 모두가 옷맵시를 보며 배꼽을 붙잡고 터져라고 웃어됐다. 아무튼 최고 의 코미디가 연출되었다. 광주에서의 피나레는 이와같이 막을 내리는 가보다. 인상적인 시간 들이었다.

1966.11.24.(木)비:

오전 여덟 시쯤 조반을 하고 온종일 집에 틀어 박혀 있었다. 친구들과 더불어 공리공담을 늘어놓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비가 소나기 좍좍 내리퍼붓고 처렁처렁 구슬프게도 내리고 이따금 빗방울이 또옥 또옥 시인의 발자국처럼 들려주곤 한다. 신문을 읽다가 책을 보다가 영어 독해도 하다가 가만히 누어 있어도 보았다. 내일 모래면 이제 휴가를 받아 전방 원 소속부대로 귀대 할 것이다. 이곳 광주에서 나는 가끔 독서에 조예가 깊은 여자들이 우리 친구들을 방문하여 토론 했을 때 여자들의 공통된 의문점 을 하나하나 들어보았고 어디까지나 추리적인 인식 이겠지만 여자의 심정 을 대충 알만도 하다. 그리고 이곳에서 내가 어떻게 시간을 보내 왔는가를 잘 알고 있다. 후회해야할 일 같으면서도 후회 해서는 아니 될 일이었다. 내 自身이 만들고 동조한 시간과 행동 이었다. 나의 낭비시간 은 내가 책임 져야 한다.

1966.11.25.(金)흐리고 비:

오늘이 초등군사반 교육과정 의 졸업(수료)전야이다. 적어야 할 것이 기록해야할 것이 너무 많다. 무엇부터 시작 할가? 어제까지 결석 했으니까, 그 전날의 상황은 잘 모르지만, 아마도 출근 하자마자 나의 퇴교문제 에 관하여 윗사람들이 나를 부를 줄 알고 나는 내 소신을 피력할 만반의 준비를 맘속으로 결심 하고 대기 했다. 첫 시간은 졸업식 예행연습 준비로 야단들이었다. 그 와중에 마침내 포대장이 나를불러 포병학교장 최고 징계위원회 에 데려다 주었다.

징계위원회 구성은; 학교장(준장), 학생단장(대령), 교수단장(대령), 부 교장(대령), 참모장(대령), 등등 모두 일곱 분이었다. 본 징계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나 혼자였다. 나를 불러 앉혀놓고 일곱 분들이 번갈아 신중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나는 가끔 호흡을 조절하며 한마디 한마디씩 나의 소신을 밝혔다.

때때로 부교장께서 버럭버럭 화를 내시기도 했다. 감정이 과격한 질문에 대해선 나는 답변을 피하고 침묵 으로 일관 했다. 한 참 후 참모장께서 좋은 조언과 함께 나의 이야기를 함축성 있게 타진헤 주었다. 나는 한마디씩 소신을 밝혀 보았다. 퇴교, 파면, 급제중 어느 것을 택하겠는냐고 부교장께서 다그쳐 묻지 않는가, 나는 한참 머리를 숙이고 생각하다가 답변했다.

저가 잘잘못을 알고있고 그 잘못을 깊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길은 국방만이 아닌 다른 길도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됨니다. 아직도 저가 젊은 세대 이기에 국가를 위한 다른 길에서도 저의 능력을 분출할수있도록 배려해 주신다면, 군복을 벗고 나서 나라를 위해 또 다른 방법으로 최선의 봉사를 할 일을 찾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 하겠습니다. 저의 잘못에 대한 처벌은 어떤 것이든 받겠습니다. 다만 젊은 나이에 세파를 해쳐 나갈 수 있도록 관대한 선처를 바랄 뿐입니다. 라고 답변 을 드리니, 학교장님은 아무 말 없으시고 부교장님께서 한참 후 나를 보고 알겠다고 나가보라고 했다. 그것이 나의 최후 진술 이었다. 인사처(G-1)에 가보니 나의 졸업장이 이미 나와 있었다. 나는 이것을 받으면 제대 할 수가 없다. 내가 지금 받고 싶은 것은 졸업장/급제/파면이 아니라 퇴교, 퇴교장이야. 아마 큰 하자없이 제대가능 예감이 든다.

1966.12.3.(土)흐림:

귀대 보고 아침에 나의 원소속부대 포대장 에게 귀대신고 하니 몹시 반가워했다. 곧 이어 인사과장 과 대대장께 신고했다. 대대장 님께서는 왜 군복을 벗으려고 했느냐고 야단 이셨다. 나는 빨리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순간 대답을 피하고 싶었지만, 천천히 말씀을 드렸다. 들으시고는 전역 신청서를 신청하라고 하셨다. 인사처 에 갔다가 포대에 내려왔어 내무사열 준비를 거들었다. 내무사열 을 마치고 점심 식사 후 포대병사 전원을 집합시켜 놓고 나의 진급 축하를 나누기 위해 약 70명의 병사들에게 “은단(銀丹)” 한 캐이스 씩을 present 했다. 오후 포대장께서 휘하 중상사들과 더불어 간단한 식사와 동시에 술도 한 잔 식 걸치자는 것이다. 나는 간단한 선물로 대체하고 싶었지만 포대장께서 원하시는것 같아 더 이상 우길 수 도 없이 끌려가고 말았다. 또한 그것을 내 똥 고집으로 밀고 나갈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나의 개인향학이란 욕망 때문에, 군생활을 우유부단으로 이어왔다고도 볼 수 있다. 이제는 나의 방향이 확실히 결정 되어 있기 때문에, 주저없이 군복을 벗는 날까지 담담한 마음으로 군 생활의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충실과 성실로 끝을 맺고싶다.

1966.12.4(日)흐림:

아침에는 광주 포병학교 학생단장 과 대대장 에게 그 동안 교육과정 중에 나에게 베풀어준 후의에 너무도 감사했다고 심심한 안부의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나서 특별한 스케줄 없이 부대 위관급 장교들과 난로가에 둘러앉아 재미나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라디오 듣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점심시간 인줄도 모르고 있다가 부하들이 식사를 들고 오는 바람에 식사 때가 된 줄 알았다. 군대밥 이지만 맛은 있었다. 장교밥 이라고 하얀 쌀밥을 먹었다. 그것이 사병들과 차이 인지? 오후 에는 장교들이 휴일이니까 전곡마을에 나가서 음악감상을 하든가 영화감상을 하자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아 나 혼자 “大光里;대광리”에 있는 옛날 근무 하든 부대에 친구들이 만나고 싶어서 그곳으로 가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도로 부대에 와서 한방친구(Roommate)인 金 中尉 와 바둑을 세판 두고 난 다음 잠이 들었다.

1966.12.6.(火)맑은 후 흐림:

아침 출근 하자마자 제 2포대(Bravo)포대장 에게 인사를 하고 F.T.X. 훈련준비 예비검열 에 대비한 일에 나도 거들었다. 모든 것이 어색했다. 정든 포대가 바로 옆에 있지만 그래도 서먹서먹했다. 그래도 점심밥은 장교숙소(BOQ)에 가서 먹었다. 오후에는 제2포대 의 상황실(FDC)에서 포대장이 포대 모든 장교와 중상사들을 불러 놓고 식사문제 에 관하여 사병들과 꼭 같이 먹어야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기에 관하여 다른 아이디어 가 있으면 말해 달라고 했다. 나는 몇 마디 하였다가 결론은 지휘관 의 복안을 따르겠다는 것뿐이었다. 이발소에 가서 나는 면도를 하고 다시 FDC(상황실)에 있는 난로가에 앉았다. 4시경에 내무반에 포대원을 전원 집합시켜놓고 포대장이 나를 소개시켰다. 나는 나의 복무계획 을 간단히 피력했다. 모든 것을 가정과 같은 분위기로 다스리겠다는 것이 나의 복안 이었다.

1966.12.7.(水)흐림:

제3포대(Charlie) 포대장에게 이제 제2포대(Bravo)로 특명이 났다고 인사를 나누었다. 좀 섭섭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인생살이 어디에도 마찬가지 무대의 배우같이 감독이 시키는 대로 따라야 작품이되겠지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아무 것도 모른 체 돈에 팔려가듯이 그런 기분을 이해할것같다. 이것이 현실이다. 사회에서는 가진자와 안가진자 간에 주종관계(主從關係) 사이의 현실속에 불가피하게 묵묵히 받아들이고 살아 가야한다. 현재 근무할 포대의 행정반에 도착하여 내 할일을 찾았다. 포대장은 중상사급을 집합시켜놓고 작업지시 를 하달하였다. 그리고는 대대참모회의 에 가셨다. 나는 포대 부관과 김소위와 함께 FDC에서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포상(대포위)의 위장망(僞裝網)을 뜬다고 장교 셋이서 두리 번 그려보았다. 어저께 이 포대로 전입명령을 받아온 나로서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황을 잘 파악 못했다. 생각건대 작업지시 내려도 진행상태가 매우 완만하였다. 오늘저녁에는 포대장 께서(基督敎 信者) 군목(軍牧)이 아닌 민간인목사님을 모셔놓고 내무반에서 예배를 보았다. 그것뿐이 아니다. 저녁에는 단계별 로 초등교육(영어/수학/국어)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과연 좋은 일들이다. 쉽지 않은 일들이다. 긍정적 인면은 적극협력 해야 되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 이다. 그러나 너무 유토피아(Utophia)적인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훌륭한 일인 것 같으면서도 좀 위험한 통솔이 아닐까 염려스러웠다.

1966.12.8.(木)눈과 흐림:

오늘 새벽에 찾아 온 모양이다. 하얀 山과들 그리고 마을 , 白雪이 몰래 내렸다. 山에도 들에도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나는 아침을 먹고 난 다음 포대장에게 군단포사 포사령관 님께 전입신고 를 하고 오겠다고 인사하고 나갔다. 대대본부에서 차량을 내주지 않아서 버스를 타고 갈려고 했어나 버스가 오지 않아 눈길을 가만히 거닐고 싶었다. 그대로 도보 행진 했다. 약 200 meters 가까이 걸어갔을 때 초등학생 아이들이 달려오면서 “아저씨 같이 가요” 하고 따라오고 있지 않는가. 아이들과 강아지들과 함께 노닐 때마다 나는 모두들 자연속에 무아경지(無我境地)속에 함북 젖어 들곤 한다. 그래 같이 가자고 하며 손에 손을 맞잡고 동심속에서 이야기를 조잘대며 걸었다. 어린이들은 약 2키로까지(新望里 마을) 걸어서 학교를 다닌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12킬로를 더 가야하기에 어차피 버스를 타야했고 또한 시간도 없었다. 마침 그때 버스가 오기에 얘들아 길가로 걸어라! 나는 이 차를 타고 멀리 가야한다고 하니, 얘기들은 아저씨 안녕! 이라고 공손히 절을 한다. 나는 버스를 타고 오면서 무엇인가 기쁘기 한량없었다. 10시10분 전에 포사령부에 도착하여 신고를마치고 같이 신고를 하러온 군대동기와 함께 “全曲;전곡“마을의 다방에 들어가 좀 앉아 있다가 버스를 타고 “新望里(신망리)“ 마을까지 왔다. 그러나 부대까지는 차편(車便)이 없어서 걸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걷고도 싶었다. 한참 걷고 있는데 약 50메타 앞에서 또 아이들이 있지 않은가. 가까이 다가 갔더니 모두들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아저씨 아침에 우리들과 같이 걸었죠 그렇지요?”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우리들은 잘 알고 있어요” 손에 손을 잡고 그대로 부대 앞까지 걸었다. 걷는 도중에 남자 아이들이 장난이 심하다. 한 여자 어린이가 “머스마들이 참 짓궂어요” 몇 번이고 되풀이한다. 그래 “머스마들이 나쁜 사람이지” 하고 동정 발언을 하니 “참! 짓궂어요” 란 말만 몇 번이고 되풀이한다. 너그럽고도 착한 어린이 들 이었다. 부대앞에 가까이 다가와 어린이들과 헤어지게 되었다. “아저씨 잘 가요 그리고 내일 또 같이 가요?” 외쳐된다. 나는 무조건 “그래그래?”라고 대답만했다. 돌아와서는 포대장에게 보고하고 FDC(상황실)에 가서 나의 할 일을 했다. 저녁에는 간단한 군장검사(軍裝檢査)를 했고 저녁 먹고는 포대 에 다시 찾아가 포대사병들이 저녁 한시간씩 영어/수학/국어를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 것을 보고싶어서 가보았다. 나는 약 한 시간동안 기초영어를 설명 해보았다. 내 딴은 자미 있게 가르친다고 했는데 피교육자 들은 어떻게 여겼을지 모를 일이다. 오늘은 나에게 참 바쁜 시간들이었으며 또한 참 기쁜 시간들이 지나갔다. 흐뭇한 하루였다. 오늘 오후에는 눈이 거의 녹았었고 땅은 철벅철벅했다 먼 산에는 아직도 그 백설이 태연자약(泰然自若) 하게 눈 옷을 입고 있었다.

1966.12.9.(金)맑음:

아침부터 FTX(기동훈련) 군장검사 때문에 몹시 바빴다. 오전 9시에 군단 포사령부에서 검열이 나올 예정이다. 그런데 나는 포대의 준비를 8시40분 까지 거들었고 그 이후부터는 내가 맡은 임무 FDC(상황실)에서 대대 연락장교로 나갈 준비를 했다. 사항을 듣고 상황판의 낙탄보고철과 화력계획투명도 등등을 수령했다. 20사단 포사령부에가서 화력지원 협조관으로 대대장을 대리하는 근무인 만큼 중요한 임무임은 사실이다. 나는 나의 임무(연락장교)를 몇 번이고 읽었다. 그런데 포사령부에서 검열관 이 아직도 출발하지 않았다고 상과(FDC) 보좌관 김중위가 알려주었다. 나는 연병장에 내려가서 관측조(FO) 와 같이 서 있기로 했다. 원칙은 FDC(상과)원들과 같이 검열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무선/유선병을 데리고 있는 것으로는 관측조 와 비슷했으므로 그들과 함께 검열 받기로 했다. 병사들의 관물 을 조사하고 정돈 하게 했다. 그때까지도 검열관들이 오지 않아 우리 초급장교 들은 바로 위에 위치한 의무실에 들어가서 대기했다. 곧 검열관들이 도착한다고 연락을 받았다. 우리는 열을 맞추어 정열 해 섰다. 마침내 검열관들이 도착했다. 대대본부 포대장은 “차렷”구령과동시에 군장검사 인원 보고를 하고 “검사준비끝”이라고 외쳐됐다. 검열관들은 먼저 관측조 에게로 왔다. 관심의 이유는 관측조는 난로도 피울 수 없고 여러 가지 조건이 겨울추위의 훈련에 준비가 미비한것같기 때문이었다. 관측조 는 보병들과 함께 따라다니며 천막을 간단히 치기도 하고 차량도 없기 때문에 간단히 피울 수 있는 난로도 가지고 다닐 수가 없다. 숯불을 어떻게 피우느냐 잠자리를 어떻게 하느냐 등등 많은 질문성(質問性)점검이 오고갔다. 병사들의 벙어리장갑 등등의 추위에 견딜 수 있는 준비 를 주로 착안 한 검열 인 것 같았다. 한 시간도 못되어 검열 은 끝났다. 나는 다시 포대에 내려갔다. 포대장에게 검열 끝마치고 왔다고 보고 를하니 수고했다한다. “뭐! 수고 랄 것이 있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오후에는 봉급을 탔다. PX 의 부채도 갚고 내일은 “新望里;신망리“ 마을에 가서 파티 연회값을 지불해야지. . . 저녁 식사 를 일찍 하고 FDC에서 중상사 이상 포대장 까지 새로 전입온 나와 김소위 그리고 인사계 상사가 식사회 를 열었다. 마치고 약30분후에 병사들의 공부시간 이 닥쳐왔어 나는 기초영어를 또 가르쳤다. 오늘은 병사들도 흥이 나는 모양이었다. 어제보다 병사학생들이 더 많았다. 나 역시 기분이 좋았다. 무엇인가 서로 이끌고 밀고 싶은 것이 젊은이들로서는 보람있는 일이겠지 시간 중 틈틈이 여러 가지 국내외 이야기도 삽입시켜가며 강의 했다. 오늘도 나는 가치 있는 날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도 해본다.

한 밤중이 되어 BOQ(장교숙소)로 돌아와 보니 달도 없었고 하늘은 맑았고 별들은 여름날같이 비비고 들어갈 틈도 없이 총총히 온 하늘을 둘러 쌓여 놓고 하늘나라를 경비서고 있었다. 나는 휘파람으로 “알로 하오에” 노래를 부르며 오는 도중 갑자기 보초병의 수하(誰何)에 깜짝 놀라며 수하(誰何)에 응(應)하였다. “누구야”라고 하기에 “나는 李 중위다” 라고 응답하니 암호를 묻는다. 나는 “dog" 라고 대답했다. 보초병은 ”화랑“하고 구호를 외치며 ”보초근무中 이상 무“ 라고 대답한다. 근무 잘하라고 말하고 계속 숙소로 맑은 겨울의 밤하늘을 쳐다보며 묵묵히 걸어 들어왔다.

1966.12.10.(土)맑음:

일찍 포대 에 출근 했다. 중상사(中上士)를 다 모아놓고 포대장이 지시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 FTX 훈련 에 대비한 준비사항 과 오늘 토요일은 포대 내무사열 을 취하라는 대대본부 에서 내려온 지시를 하달했다. 9시에 포대 내무사열을 취하기로 되었다. 내무사열 시에 내가 착안하여 볼 것은 ; 두발/이빨/세수/마후라/내의 등 세탁이었다. 대부분 병사들은 내가 착안한 사항은 잘되어 있었다. 그리고 난 다음 수송부 내무반 으로 갈려고 하니 눈이 펑펑 내리 쏟아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함박눈이었다. 눈을 맞으며 수송부내무반 으로 들어갔다. 병사들의 세탁은 잘 되어 있지 않았고 기름이 배인 옷이 많았다. 검열 을 다 마치고 포대에 돌아오니 포대장이 병사들을 모아놓고 화를 내어 함성을 지르며 야단이었다. 이유를 알아본즉 포대장이 직접 취한 여론조사 결과 다른 포대에 비해 적량급식이 나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무반 내에 매질이 많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포대장은 내가 알기만 해도 바르고 청렴결백하게 처신 하는 것으로는 대대 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사람으로 다들 알고 있다. 병사들의 마음이란 순간의 감정으로 좀더 편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사병들의 심정 이었다. 여론조사 에서 나타난 대답들은 모두 그러한 면이 다수 있었음을 부인 할 수가 없다. 내가 지금 상황을 판단하기엔 우리 포대장이 자기 욕심에 훨씬 못 미친 결과에 완전 실망에 빠진 것 같았다. 그래서 홧김에 오전 11시에 내무사열을 재실시 하게 했다. 전라도 광주출생이라 경상도 사람보다 독(毒)한 것 같았다. 내무사열을 다 끝마치고 나는 FDC 난로 가에 앉아서 담배를 한가치 태우고 점심식사후 통근뻐스를 타고 “新望里;신망리“ 마을로 나와서 외상값을 갚고 난 후 기차(汽車)를 타고 서울로 왔다. 누님 댁에 갔더니 누님이 없었어 형님 댁으로 도로 와서 밥을 먹고 어머님은 둘째 형님 댁에 가시고 안 계시기에 형수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 열시 반경에 큰 형님이 들어오셨다. 들어 오시자말자 저를 부르신다 “수달아(내어릴 때 이름) 이 방(房)으로 오너라” 해서 갔더니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밤12시가 넘었는데도 이야기는 계속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해석하면 한사람 聽講生(청강생)을 앉혀 놓고 강의연습(speech-practice)을 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 강의(講義)가 재미도 있었기에 끝날 때까지 앉았다가 나는피곤한 몸으로 잠자리에 들어갔다.

1966.12.12.(월)맑음:

FTX 훈련상황 이다. 내 직속부하 병사에게 대대에 가서 메트레스 와 개인용 천막을가져오라고 했다. 그 사이에 대대장이 내가 근무하고 있는 야전이동 상황실로 들렸다. 나는 거수경례 군대식 Greeting 을 했다. 아무 응답도 않고 부사령관 과 이야기 만 하셨다. 나는 옆방의 군수실에서 난로를 쪼이고 있었다. 마침내 대대장은 나가시는 것이었다. 그때 역시 거수경례 를 했다. 그랬더니 대대장께서 나에게 군용차량을 어디에 두었느냐고 하시기에 본대대에 개인천막을 가지러 보냈습니다고 대답했다. 그때도 아무 말도 않고 고개도 끄떡이지 않고 나가시었다. 저녁이 되어 兵士들은 이 혹독한 추위에도 따뜻한 밥 과 따뜻한 국 과 물을 마련해준다. 나는 난로가에서 땀을 흘리며 먹었다. 상황실 에서 저녁 7시경 브리핑(Briefing)을 마쳤다. 그리고 특별상황이 없으므로 취침하라는 지시가 하달 되었다. 나는 차를 몰고 포사령부 내무반의 벽난로 옆에 잠자리를 마련하고 부하들은 부득이 무전차(無電車)/통신차(通信車)에 잘 수밖에 없었다. 캄캄한 밤이었지만 하얗게 덮인 눈(白雪) 에 은은히 은근히 밝기만 했다. 이제 또 무엇인가 생각하며 잠을 청해보자.

1966.12.13.(火)맑음:

계속되는 야외 훈련상황 이다. 오전 6시에 일어나 포사령부 상황실 에 갔다. 도착 하자마자 늦게 왔다고 야단이다. 곧 본 대대 상황실 로 전화를 해보니 역시 S-3 상과장(대위급)이 화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들어온 가상적(假想敵)상황과 우군 의 이동상황 을 보고했다. 몹시도 바빠서 세수를 하면서 전화를 받아야 할 형편이었다. 밥을 번개같이 먹고 이따금 적의 이동을 대대2과로 보고했다. 때때로 난로가에 앉아 있노라면 노곤한 잠도 들곤 했다. 점심때쯤 우리대대가 FEBA 저지진지로 이동 한다는 것이다. 20사단 포사령부 상황실 에서도 포사령부 내에서 조금 이동을 했다. 오후 3시경 20사단 포사령부 도 FEBA 저지) 진지로 이동을 했다. 날은 몹시도 싸늘하고 차디 차가웠다. 오돌오돌 떨면서 도착하고 보니 모든 골짜기와 도로가 백설(白雪)로 가득 찼다. 백설(白雪)이 아니라 큰 눈 사태(沙汰)였다. 아! 참! 추웁기가 끝이 없다. 이렇게 추울 수 가있나? 이렇게 고생을 해도 대대본부에서는 계속 야단만 칠 거야. 하기야 내가 대대에 보고하지 않으면 대대의 임무가 마비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또 얼음 속에 밥을 지어야 되고 추위는 더해 가고 하는 수없이 저녁에는 대대진지 까지 보고하러 갔다. 대대본부 에 갔더니 사정을 알았다고 그대로 근무하고 있으라는 것이다. 돌아와서는 일찍 자기로 했으나 너무 추워서 자다가 동사(凍死)할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하는 수없이 차량적재대에서 사병3名과 함께 잠을 청했으나 너무도 추워서 잠이 오질 않았다. 수통에 물을 데워(끓여)서 발 밑에 놓고 잠을 자려고 했으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새벽 2時경 추워서 잠이 오지 않아 하는 수 없이 포사령부 FDC(상황실) 난로가에 앉아 그대로 날을 세웠다.

밤하늘의 별들은 고요하기 끝이 없고 막막한 골짜기엔 흰 눈들로 에워 쌓여 있고 바람도 잠을 또한 자고있었다. 이따금 맑고 고요한 하늘엔 소리 없이 별똥별이 이 밤의 적막을 부셔 버릴 듯이 내리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무엇인가 멍청하게 아무 생각 없이 멈추어진 공간의 시간에 그냥 서있는지 앉아있는지 무아경지(無我境地)속에 둥둥 떠서 있었다. 나는 이 시간에 난로옆에 앉아 불을 쬐며 번갈아 손을 쬐었다가 엉덩이를 쬐었다가 발을 쬐었다가 또다시 손을 비벼 쬐며 이 밤을 지새웠다.

1966.12.14.(水)맑음:

오전 7時경 모두들 일어났다. 아침에 군단 포사령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대대 장교가 파견나가서 나와 우리대대 FDC 간(間)에 업무연락 을 중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세수나 해 볼까 하고 나갔는데 타올 수건이 마른명태같이 뻐덩뻐덩 했다. 그래도 세수 를하고 타올(towel)을 불에 녹여서 닦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물 같은 국에 밥을 말아먹고 나서 지금까지 전개된 여러 가지 상황을 차 상급 부대에 보고해 주었다. 보병들은 후퇴후 다시 10시30분경 역습한다는 상황을 접수했다. H-25부터 H+5 分까지 포병 화력이 공격준비 사격을 하기로 계획되었다. 우리대대 21표적에 251발을 사격하기로 되어있었다. 12시경에는 목표 4거점을 탈취하고 13시에는 탈취완료 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오후에는 좀 한가해서 신문도 보았다. 우리 병사들이 부식(副食)이 없다하기에 자동차로 대대본부에 가서 부식(副食)을 좀 수령해오라고 지시했다. 약2시간후에 도착했다. 얼마후에 저녁을 먹었는데 김치도 있고 국도 맛있고 했어 역시 부식(副食)반찬의 위대함을 새삼 느꼈다. 가끔 내가 파견되어 있다보니 귀속부대 차상급자들이 농담을 자주 건넷다. 그 부대 부사령관이 나에게 “ 911대대 연락장교! 예! 너희 대대 유선(有線)이 통(通)하기도 하나” 조-크를 한다. (훈련때 마다 군대에서는 통신이 시원스럽게 될 때가 드물다. 이것 때문에 부대마다 지휘관들의 문책이 심하다.) 싫은 우리 역시 통신(通信)이 안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대답하기를 “유선(wire)을 빌려주시면 지금 당장 통(通)하겠습니다.” 라고 응수해 넘어갔다. 지금은 군단 포 사령부 와 중계 를하여 통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그것 다행이군” 라고 한마디 던지고 지나가신다. 저녁 8시경 중계통신 으로 적군사항과 우군(友軍)사항을 보고하고 오늘 저녁에는 다른 연락장교와 더불어 민간인 집에 자기로 했다. 민간인 부엌은 어찌 그렇게도 포근해 보였던지 그 아늑함은 말로 다 표현할수 없었다. 정말 보통땐 아무것도 아니던 집이 이런 훈련중일 때면 상상(想像)의베르사이유 궁전(宮殿)보다 더 훌륭한 집에 들어온 기분이다. 역시 바깥 날씨는 차가웠다.

1966.12.15.(木)흐림:

새벽 5시경 까지 상황실에서 근무했으나 별다른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포 사령부 소속 장교들은 그 시간까지도 화투장을 들고 있었다. 잠 한숨 자지 않고 밤샘을 한 셈이다. 아침 식사때가 가까이 오자 그 장교들은 의자에 앉은 체로 코를 고는 것이었다. 그런데 식사때를 전후로 하여 상황은 급했다. 4거점(據點)을 철수(撤收) 했던 것을 다시 탈취/철수 반복하고 26사단에서 지원공격하여 또 탈취(奪取)하고 공격준비사격과 TOT사격(射擊) 및 탄막사격(彈幕射擊)으로 바빴다. 결국 4거점(據點)을 탈취 성공했다. 11시경에 이제 방어태세로 있어야한다는 것인데, 아마 내일까지는 방어 해야될 훈련이다. 날씨가 추워서 兵士들의 동상예방(凍傷豫防)을 강화 해야겠다. 정통한 소식에의하면 오늘 오후 2시경 이 훈련상황이 끝날 것이라고 한다. 때마침 911대대 李중위가 훈련상황 이 끝나는 대로 나를 군단 포사령부 상황실로 오라고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선걸음으로 군단포사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동기(同期)들도 만나고 조금 있다가 우리 모두는 차량으로 본부대로 돌아왔다. 오는길에 쌀을 한말을 시장(市場)에서 사들고 들어왔다. 그때 모든 포차(砲車)가 동시에 줄을 잇고 들어오고 있었다. FDC(상황실) 에 가서 도착보고를 하고 숙소에 잠시 들렸다가 포대에 가서 마무리 일을 주선했다. 모든 장사병들은 서로들 수고했다고 인사를 교환했다. 나는 FTX 훈련직전 에 잔류 병사들에게 작업지시 해 놓고 간 차량호작업을 확인해 보았다. 아직 그대로 남아있었다. 위에 모두 뜯어버리고 남은 오물들을 한데 뭉쳐 불에 태워 버렸다. 한사람의 감시병을 남겨놓고 숙소에 왔어 밥을 먹었다. 식사후 다시 포대에 나가 보았지만 모두 퇴근하고 없기에 도로 숙소로 돌아왔다. 선배 金중위님도 먼저 와 계셨다. 金中尉 식사가 끝난 후 피곤한 몸으로 잠자리에 들어갔다.

1966.12..16.(金)맑음:

아침에 이발을 하고 포대 나갔더니 주번근무 를 인수해 맡으라는 것이었다. 주번교대 신고를 포대장에게 했다. 지시사항은 간단했다. 그런데 12시쯤 다 되어서 내일 토요일 군단 내무검사가 있다한다. 그 준비책으로 병사들은 동분서주로 바쁘기 그지없었다. 나는 나대로 계획을 세워서 준비에 착오가 없도록 노력한다고 했으나 미흡함이 많았다. 오후에는 하기식이 있어서 모두 단독무장 으로 대대 연병장에 나갔다. 하기식(下旗式)을 마치고 하사급이상 부하들에게 경계강화 교육이 있었다. 우리 포대 에서는 월남(베트남) 갔다온 중사 한 분이 중사급이상 포대회식 을 자기 집에서 한다고 장교들까지 모시고 나갔다. 주번당직(주번당직)인 나를 제외하고는 그 집으로 모두 간 모양이다. 나는 포대에 남아서 열심히 내 임무를 다해보았다. 兵士들의 이발/손발/세탁/관물정돈/복장확인/군화수입/보초근무시 수하요령(誰何要領) 등등을 점검및 교육을 시켰다. 저녁에 그 회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나에게 여러 가지 음식을 가져왔으나 저녁을 이미 먹은 처지라 더 먹을 수가 없었다. 예의상 조금 손을 대었다.

1966.12.17.(土)맑음:

여섯시에 기상(잠에서일어나)하여 병사들이 냉수마찰하는 것을 보았다. 솔직이 나는 냉수마찰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기에 내 느낌은 섬뜩했다. 취사장에 가서는 적량급식을 확인해 보았다. 식사할때 질서를 관찰해보니 순서가 없다. 나는 그들에게 바르게 차례를 서라고 호통쳤다. 모두 식사를 마치자마자 내무검사 준비를 서둘도록 독촉했다. 병기손질/관물정돈/유리창 닦기/실외청소 등등 그렇게 지시하는 도중에 포대장이 들어왔다. 오늘의 내무검사는 다른 때 보다 바로 FTX 훈련 갔다온 바로 다음 날 이었기에 사내외청소와 세탁/세면 검사 등에 더욱 치중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최선을 다 해 보았다. 다른 장교들은 나보고 정말 수고했다고들 인사한다. 그런데 우리 포대장은 인간의 한계를넘는 방대한 요청이 많았다. 그런 식의 요청은 오히려 비효율적이고 비효과적이 라고 느껴졌다. 말하자면 내무교육/개인위생/군인기본자세/회보암기상태/내무반주위에 뺑끼 칠 등등 한정된 시간에 지시 만하면, 또 밀어 부치면 다 가능한것 같이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정말 하루저녁에 다 하기에는 훈련에지쳐있는 병사들에게는 너무 벅차고 그렇게 한다면 수박 겉 핥기가 된다. 포대장은 육사출신(육군사관학교)에다 전라도 광주출신 이어서 그런지 자기개인 영달과 윗사람의 考課評點(고과평점)에 더 신경을 쓰는 느낌이 더 강하게 내 피부에 와 닿았다. 그러한 이유로 부하를 사정없이 희생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느낌이 든다. 위로 뛰어 오르기 위해 수단방법이 없는 사람같이 보인다. 그것도 기독교 종교인 란 미명아래 위험천만 의 속성(屬性)을 가진 인물인 것 같다. 그런데도 나는 포대장을 따라 네! 네! 하고 yes-man 의 행세를 하며 대답만 일관 다. 오후에는 병사들을 외출 내보내고 저녁에는 잔류병사들과 오락회를 실시헸다. 그리고는 간단한 지시와 동시에 취침점호를 취했다.

1966.12.18.(日)흐림:

새벽에 오늘 할 일의 계획을 식기소독/ 세탁/ 옷 보수/ 변소청소/ 배구대회준비/ 거미줄제거/ 자유시간/ 내무교육/ 등등을 구상하고 그대로 실천했다. PX 사용을 제한했다. 배구 네트를 치고 외출 나가지 않은 병사들을 어떻게 하면 영내에서 즐겁게 지내도록 할 수 있을까 하고 연구해보았다. 그런데 웬걸 배구 튜브가 펑크가 났다고 했다. 그 외 방법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 나는 병사들이 세탁한 것을 일일이 확인해 보았다. 식기소독도 확인했다. 점심 식사 때는 취사장에 가 보았다. 식사배식을 적량대로 하는가, 된장이 적게 들어갔는지 등등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먹어보았다. 아무래도 된장이 적게 들어간 것 같았고 오히려 소금이 많이 들어간 것 같았다. 나는 취사병들에게 규정된 적량을 공급하라고 호령 치고 불시에 자주 점검하겠다고 다그쳤다. 오후에는 자유시간을 부여 했다. 저녁에는 관물정돈 을 통일시켰다. 다음의 일주일을 무난하게 보내기 위해서 저녁 19시에는 행정반의 출입보고 요령을 한사람 한사람씩 점검했다. 그리고 즉시 취침을 시켰다. 그런데 외출자 중 마지막 한사람이 밤 12시 가까이 되었어야 들어왔다. 나는 매우 마음이 상했다. 물론 단체생활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만 내가 외출 내보낼 때 자연스럽게 보내고 귀대할때도 시간에 맞추어 자율적으로 규정에 맞게 돌아 올 줄 알았는데 실망했다. 특히 내 소대원이 나를 배신한 것 같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하나의 단체를 위해서 한사람의 개인사정을 봐 줄 수 없기에 가혹하지만 특성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오전에는 약11-12명을 교회에 보냈다. 나 역시 가고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병사들의 자기자신의 몸과 의복에 관한 것을 씻고 세탁 해야할 것이 많았다. 내가 내 자신을 판단해도 비 종교인이고 종교인이 아직은 아니었다. 그런 대로 오늘은 보람있는 날이었다고 생각된다. 성실이 짜여진 하루였다. 밤에는 외박을 보낸 한 병사를 광주 순천에서 면회온 여자가 있었다. 그래서 먼길에서 왔기 때문에 부대귀대시간 잘 지킨 그 병사를 만나고 오라고 다시 내 보냈다. 그리고 대대 일직사령에게는 부대원 전원 귀대 완료했다고 보고했다. 그렇지만 한편 걱정이 되는 것은 다시 내보낸 그 병사가 무슨 곡절이 있어서 귀대하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1966.12.19.(月)맑음:

아침 조회를 통해 병사들의 병기손질결과 검사를 실시하였다. 토/일요일 수고덕분에 병기는 깨끗했고 내무반도 깨끗했다. 그런데 걱정이 되는 것은 어제 밤에 부득이 특별외출로 내보낸 병사가 아직 귀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후가 되어도 오지 않고 해서 결국은 부관님께 보고했다. 그랬더니 한사람을 내보내어 찾아 데리고 오게 했다. 마침내 오후 2시30분경 그 장본인이 들어왔다. 나는 좀 화가 나서 특성훈련 을 약30분간 시켰다. 저녁 식사시간 에는 취사반에 가서 적량급식을 좀더 구체적으로 따져 보았다. 쌀을 퍼서 솥에 넣을 때까지 확인했더니 밥은 희고 맑았는데 5명분 밥이 부족했다. 나는 병사들에게 여론을 조사를했다. 보리가 많이 들어가도 양(量)을 택할 것이냐, 쌀의 적량을 맞추어 질(質)을 택하여 먹을 것이냐, 라고 물었더니 양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로 하고 저녁에는 약 2시간 공부를 가르치고 피곤한 몸으로 숙소에 들어왔다.

1966.12. 21.(水)맑음:

아침에 출근하니 병사들이 태권도연습 을 하고 있었다. 모두들 열심이었다. 나는 내무반 환경상태를 두루 살펴보았다. 한구석에서는 몇 명이 크리스마스 추리(X-MAS tree)를 만든다고 열심이다. 이것은 신(神)을 찬미하는 서방세계의 모방이기도 하지만 즐거운 준비인것 같기도 하다. 태권도 연습을 마친 병사들은 포(砲)방카에서 위장망을 뜨고 있다. 나는 그것을 한참 관찰하기도 했다. 그럭저럭 저녁이 닥쳐왔다. 대대에서는 대대장의 이임(離任)에 앞서 신구(新舊)임 대대장을 모셔놓고 파티를 연다고 장교들은 모두 참석하라는 것이다. 모두들 통근차를 타고 “蓮川;연천”마을 까지 나갔다. “동해반점(東海班店)” 이란 중국음식점에서 파티가 열렸다. 술잔이 오고가고 하며 나도 조금 마셨다. 그런데 술이 몹시 독한 것 같았다. 얼마 후 소위(少尉)들은 한쪽방구석에서 화투장을 벌렸다. 그러나 소위급외에는 가입(加入)할수 없다고 한다. 나도 같은 세대이고 초급장교 기분인데 분리 당하고 말았다. 군대용어로 열외 되고 말았다.

아무튼 오늘의 이 파티가 나 자신에겐 좀 섭섭하고 서운한 감이 들었다. 말은 별로 하지 안 했지만 인자(仁慈)하신 대대장에겐 많은 정(情)이 들었든 것이었다. 그리고 물심양면으로 많은 혜택을 받았다. 대학교 학과전과(學科轉科) 편입시험(西班牙語科에서 貿易學科로) 치러갈때도 그것 역시 대대장님이 허락해 주셨다. 그때 당시 바로 직속상관인 포대장은 허락 못하겠다고 했다. 대대장님은 나의 개인 일을 직접 대변 하기 전에 뒤편에서 은근히 보살펴주셨던 분이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인품에서도 나는 대대장님을 존경하고 있다. 나는 정(情)이든 대대장님을 이곳에서 떠나 보냈어야만했다. 전번에는 내가 떠났는데 이제는 내가 보내야만 하는 입장이 되었다. 정말 섭섭한 일이다. 저녁에는 회식을 마치고 대대장님과 악수를 나누며 나는 한참동안 손을 꼭 붙들고는 참! 참! 하고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나는 훌륭한 지휘관님을 놓치게 되었다. 내 마음 섭섭함을 못견딜 지경 이었다. 언젠가 나에게 “사람은 자기를 위해 살고 있다.” 라고 하신 말씀이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깊이깊이 박혀있었다. 요즘의 내 인생의 서러움과 맞닿아 서운한 내 맘을 억제 할 수없이 떨리기만 하였다. 어떤 여인과의 이별(離別)도 이렇게 아쉬운 감정이 깊게 쌓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 너무나도 존경하는 대대장님!

1966.12.28(水)맑음:

아침에 포대본부에 출근했더니 이미 중상사급 이상이 포대장을 앞에 두고 지시를 받고 있었다. 나는 뒤늦게 포대장에게 인사를하고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회의가 끝난 즉시 나는 여섯 명의 로켓포 조 병사를 데리고 사격하러 나갔다. 대대전체가 22名 나갔는데 실탄은 100발 을 사격하기로 되었다. 그런데 사격한뒤 탄피는 100% 모두 반납하라고 했다. 그것을 고물장사 들에게 넘기면 1발에 100원 내외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사격중 모두 추워했다. 가스가 새어 나와 몇몇 병사는 얼굴을 다쳤다. 기후관계 인지는 모르나 가스 유출이 심했든 모양이었다. 우리는 고물탄피 를 모두반납하고 부대에 돌아오니 포대사병들은 포대장과 포대장교들과 함께 군장행군나가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FDC에서 난로를 쬐고 있으니 마침내 행군대열이 도착하자마자 포대장은 나를 부르기에 오늘 사격한 결과를 포대장에게 보고했더니, 포대장은 엉뚱하게도 저녁마다 가르치는 일반공부 교육에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구상해 보라고 지시했다.

1966.12.29.(木)맑음:

오늘 오전에는 신병들의 교육을 시켰으나, 잘 모르는 것이 많았다. 오전4시간 실내에서 교육하고 오후에는 2시간 실외에서 교육을했다. 추운 날씨였지만 교육다운 교육을 했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兵士들에게 구보도 시키고 선착순훈련도 시켰다. 교육을 마치고 나는 FDC에서 쉬고 있다가 포대막사를 한번 둘러보고 지휘소대원 내무반도 둘러보았다. 그리고 저녁에는 지휘소대원들을 불러놓고 한마디 훈시도 해 보았다. 저녁 6시30분부터 兵士들의 일반교육이 시작되었다. 중복교육을 피하기 위해 그 교육을 통제해 보았다. 시간계획표도 다시 작성 하며 내일 시간을 위해 골고루 배려해 보았다. 그리고 FDC(작전 상환실)에서 담배를 한 대 태우고 난 다음 내 숙소로 돌아왔다. 나의 시간을 잃어버린 냥 허전한 날을 보냈다고 생각하며 또 내일을 기대하며 이 밤을 지내본다.

1966.12.30.(金)흐림:

오전부터 주번근무를 인계받고 명일 내무사열준비를 하느라고 바빴다. 각 창고정리 및 청소 등 병사들의 일을 함께 거들었다. 창문청소 관물함 정돈 그리고 바닥/천정/문청소/복장/세탁/옷 보수등등 준비에 열심을 다해 보았다. 일년을 총결산 하는 내무사열 경연(競演)이라 상품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저녁시간에도 여러 가지 착안사항 을 마련하여 차례로 진행시켰다. 저녁에 한참 지시하고 준비하고 있는데 대대 일직사령이 위문품을 타로 주번사관이 직접올라 오라고 했다. 나는 주번하사에게 지시하고 대대CP에 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위문품이 너무 많이 나왔다. 사과/도노포스/치약/치솔/책/비누/타올 등등 그것을 수령하여 내려오니 벌써 취침시간이 다 되었지 않은가. 점호를 취했으나 미비점이 많아 다시 취했다. 그리고 잠을 재웠다. 그런데 위문품을 하나하나 확인 해보니 부족한 숫자가 많았다. 틀림없이 제(諸)숫자대로 체크하고 받았는데 모자랐다. 그러나 나는 짐작이 가는 데가 있어 추적(追跡) 하는것을 그만 두기로 했다.

1966.12..31(土)흐림:

평일 보다 일찍 일어났다. 내무검사 준비로 인해서 아침 출근시간을 당겼다. 마침 포대장도 출근했다. 들어서자마자 연병장 청소를 왜? 이제 하느냐는 듯 인상(印象)을 찌푸렸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내 할 일만 했다. 병사들을 정열 시켜 놓고 검열관(대대장과 참모들이 도착해서 사열과 동시에 검열을 실시 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일등이 아니고 이등 이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우리 포대가 일등이 틀림없었는데 알고 보니 신임포대장이신 제1포대가 열성(熱誠)이 더 들었다고 하며 또한 고무(鼓舞)하는 뜻에서 일등을 주었다는 소문이 대대 전체에 퍼졌다. 포대장도 그 특유의 인상(印象)을 쓰고 병사들에게 화풀이하려고 한다. 좌우지간 군대란 이래저래 고약한 곳이다. 오후에는 여러 가지 위문품과 돼지고기 및 막걸리로 병사들과 오붓한 오락시간 을 마련했다. 올해의 마지막 날이다. 명일이면 일년을 365일로 계산하지 않아도 하루만에 바뀌어 지게 된다. 마지막 날에 기분이 나쁜 것은 포대장이 병사들의 오락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음은 좋지 않았지만 병사들에게 감정을 노출해 보이기는 싫었다. 저녁에는 포대장이 지시한 빨래를 삶고 빨고 했다. 그리고 나서 병사들을 모아놓고 음악시간과 만담시간을 가지게끔 했다. 저녁8시가 되어 모두 취침점호 를 취했다. 나는 FDC에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런데 이 금년의 마지막 날에 휴가귀대 장병이 있었으니 그 역시 귀대하기가 싫었을 것이다. 그러나 용감하게 귀대했다. 가정(家庭)을 두고 부모를 떠나 자기혼자 자기발로 들어왔다. 인간자신이 만든 고통(苦痛) 이겠지, 그 때문에 그도 들어왔고 다른 사람들도 귀대일자에 들어와야만 했다. 나는 저녁 잠자리에 누어서 지난 일년을 회고해 본다. 희망 때문에 우정(友情) 때문에 신념(信念)과 집념(執念) 때문에 보람된 삶 때문에 젊기 때문에 많은 고뇌와 번민을 반복 해 왔다. 지난 일년이 그야말로 구절양장(九折羊腸)이었다.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나의 기록을 창조해 가기 위해 새해를 뜻 있게 맞이해야겠다.

1967.1.1.(日)흐림:

아침엔 좀 포근한 날씨 인 것 같다. 아침엔 또 위문품이 나왔고 떡국을 별도로 수여 먹었다. 밥은 밥대로 먹고 장사병 모두들 배가 부르다는 것이다. 온종일 오락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하나 하나 나누어주기에 불편한 것들은 모범사병을 차출하여 나누어주었다. 오늘도 바쁜 날이었다. 때때로 혼자서 담배를 태우고 있노라면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추억들로 메워 지기 마련이었다. 때로는 선(善)과 악(惡)의 구별 그리고 인격과 비인격적 인 것 과 예의등을 지키노라면 갈등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과연 올해는 무엇을 집중해야 할지? 문제는 지나친 나 자신을 위한 일년을 매꾸느냐 아니면 남을 존중할줄 아는 나의 길을 가느냐 어느 것이 진정한 나를 위해 좋을까? 이것은 정말 의문 이다. 아무튼 군복을 벗는 날까지는 보람있는 나의 처신이 되어야만 하겠다. 지나온 나의 길은 너무나 소화해 내기가 벅찬 계획과 생활 이었고 그리고 또한 많은 고뇌를 만들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기쁨의 날은 적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1967.1.2.(月)흐린 후 맑음:

매우 매서운 추운 날씨다. 어느 때 보다도 천천히 일어나서 혼자서 침구를 몸에 감은 채 가만히 앉았다. 그리고 엊저녁의 꿈을 한번 상기(想起)해본다. “집 둥치 만한 산돼지가 나를 잡아 먹으려고 했다. 나는 그 돼지를 피하려고 돌을 던지며 쫓았다. 그랬더니 돼지는 우리의 한 병사를 입에 물고 갔다.” 이것이 엊저녁의 꿈이었다. 나는 나 혼자 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좋은 꿈은 남이 알게 하면 안 된다고 자주 말씀하신 것이 기억이 나서 그대로 이행한 셈이다. 나는 주번하사를 통하여 모두 지시 해놓고 천천히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서울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나와 교대할 鄭중위가 아직 오시지 안았다. 거의 12시가 다 되어 왔다. 만나자말자 모든 주번사항을 인계하고 서울가는 차량을 기다렸다. 오래 기다렸다가 승차했다. 찻간사이에는 차가운 바람이 쉬지 않고 몰아쳤다. 왕십리역에 내려서 누님 댁에 먼저 들렸다. 그리고 목욕하고 어머니에게 갔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돼지 꿈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아무튼 돼지꿈을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내가 약한 것이다. 그러나 금년을 기쁘게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다. 참 재미나는 동화(童話)속의 세계에 들어갔다가 구경하고 방금 나온 기분이다.

1967.1.3.(火)흐림:

오전에 이종(姨從)사촌 동생이 신혼살림을 꾸리고 있는 곳을 가보았다. 나이는 적지만 여자란 먼저 결혼을 하게되는 것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관습이 되어 왔는가 보다. 그런데 신랑집이 부자(富者)이고 사람도 착한 사람인 것 같고 별 걱정 없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어쩐지 애처로워 보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벌써 여의고 저렇게 자기의 갈 길을 순순히 찾아가는 운명의 진리가 오묘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거기서 점심도 먹지 않고 나왔다. 그 걸음으로 4촌 형님댁에 갔다. 거기서 점심을 먹었다. 동생 집 보다 마음이 한결 편했다. 어머님이 항상 말씀하시기를 “사랑은 내리 사랑 인기라.” 고 한 말씀이 떠올랐다. 4촌집에서 TV 구경하다가 집으로 왔다. 나 혼자 걸어오면서 생각을 해본다. 모두들 결혼이란 것을 하고 인생살이 적응에 온 정신을 쏟아 붙고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인가 아직도 이상주의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을 앞에 두고 이상(理想)을 찾아야만 속시원할 것 같은 내 마음이 어떤 면에선 가련(可憐)하기도 하다. 정말 행복이 무엇인지 남녀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즐겨야 하는 것이 행복인지 아니면 계획있는 즐김 이어야하는지 아니면 고행(苦行) 하는 천년전의 마의태자가 선택한길이 더 영적으로 행복한 길인지? 그렇지 않으면 어차피 인생 그 자체가 결국 도박이 되고 말 것인지?

1967.1.8.(日)흐림:

일요일 이지만 부대 영내에서 쉬기로 했다. 오전 10시경에 군인교회에 가는 병사들을 차량으로 “大光里;대광리”마을까지 인솔할겸 친구 집에도 들리기로 했다. “大光里”마을에 도착 해서는 친구 집을 찾았고 육고기점에 가서 돼지고기를 한 근 사 가지고 친구의 첫 딸의 분만(分娩)을 축복하러 가고싶었다. 나는 잘 몰랐는데 바로 오늘이 갓 난 애기의 100일 기념일 이었다. 나는 약 두 시간 가량 앉아 있다가 점심을 먹고 가라는 친구 부인의 권유 를 뿌리치고 부대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부대 바깥으로 숙소를 옮길 준비를 하였다. 부대에서는 병사들의 신상파악(身上把握)을 하나 하나 해보았다. 그리고 새로 부임한 신병들도 점검 해 보았다. 그럭저럭 하루가 다 지나갔다. 나의 총각삶림도 완전히 옮기고 해서 바깥 숙소로 나왔다. 주인댁에선 그런 대로 방을 모두 꾸며 놓았다. 집이 다소 허술하기는 하지만 포근한 방(Room)이었다. 좀 신경을 쓴 것 같다. 그리고는 밥은 늦게 먹고 잠이 들었다.

1967.1.9.(月)맑음:

몹시 차거운 날씨였다. 새벽 5시부터 일어나서 밥을 하는 당번(병사)이 애처로와 도대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나는 그냥 들어오라고 했으나 사양했다. 그럭저럭 밥을 지어먹고 나가려고 하는데 이 친구가 내 군화(軍靴)를 불에 쪼여서 따뜻하게 하여 나에게 건네 주었다. 나는 한순간의 느낌에 wife의 존재가치를 느껴지기도 했다. 포대에 출근해서는 오전에는 병사들에게 교육을 시켰다. 바깥 날씨가 몹시 추워서 손발가락이 동상(凍傷)에 걸릴 것 만 같았다. 그러나 견뎌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전형적인 군인정신이 아닐까 한다. 오후에는 한가로이 포대장과 조용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저녁에는 숙소에 나가서 저녁을 먹고 포대에 다시 들어와 야간교육을 시켰다. 그리고 나서는 소대원들에게 여론조사도 했다. 숙소로 오는 길에 담배를 살려고 계획하고 나왔는데 걸어오면서 잡생각을 하다보니 깜빡 잊고 그냥 들어오게 되었다. 내 정신(精神)은 내 육체(肉體)를 놔두고 어디에 다녀왔는지?

1967.1.10.(火)맑음:

아침에 부대 출근이 약 2분 늦었다. 오전에는 포대장과 이야기 나누다가 오전 시간이 거지반 다 지나갔다. 오후에는 신병(보충역) 교육을 마지막 시간까지 가르쳤다. 오늘은 봉급날 이라 빌린 돈을 모두 송금했다. 저녁에 늦게 퇴근하여 집에서 늦게 저녁을 먹고 난 다음 포대(砲隊) 다시 들어가서 소대원들의 보급품을 검사 했다. 요즘은 모든 일들이 어리둥절하게 지나가고 있다. 내가 무엇을 할지 또 무엇을 했는지 잘 모르고 지나가고 있다. 소대원의 한 병사는 나이는 많고 늙으신 조부모를 모신 그병사의 제대를 위해 그 병사의 고향의 리장님께 편지를 띄웠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집에 가서 가사를 돌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에다 그 병사는 보급품(補給品) 망실(忘失)도 많았다. 내가 오늘과 같이 이렇게 매사에 섬세하게된 연유도 나의 군생활을 통해 이러한 망실을 없애기 위해 신경과민이 될 정도로 내 정신을 소모했기 때문에 그것이 이제는 나의 후천적인 성격이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너무 이렇게 사소한 일에 신경을 많이 쓰다보면 마치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는 옹졸한 인간상으로 변해가게 될까 염려가 되기 때문이다.

1967.1.11.(水)흐린 후 눈:

인간은 때때로 자기자신을 버리다 시피 한순간을 지내야 할 때도 있어야할 것 같다. 말하자면 침착(沈着)과 침잠(沈潛) 이러한 낱말들이 필요할 것이라고 여긴다. 오늘따라 부대에서 많은 사고가 발생했다. 그 여파로 지휘관(포대장)은 시종일관 고함을 지르고 인상(印象)을 찌푸렸다. 그 아랫 장사병들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그러나 한순간 생각해 보면 마음을 이 순간에 좀더 조용히 가지고 지휘의 모순을 지적하고 싶지만 그것 역시 인간이 저지를 수밖에 없는 숙명(宿命)의 모순(矛盾)이기도 했다. 오후 5시 25분전 부터 약30분간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함박눈이 되었다. 나와 인사계 그리고 安상사와 함께 막걸리를 나누었다. 얼큰히 취한 나는 집으로 가자고 권유했다.

“나는 뒤에서 걸었다. 내가 지금 한 인생을 걷는 양 좁은 소로(小路)를 걸었다. 나무가 나를 막고 언덕이 나를 멈추게 했고 건널 다리가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리고 개울은 나를 잡아 당겼다. 나는 그것들을 뿌리치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저녁밥을 먹었다.”

1967.1.12.(木)흐리고 눈:

출근시간 8시 2분전 되는걸 보고 집에서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포대본부에 도착하고 보니 30초 가량 늦었다. 나는 오전 2시간 실내에서 교육을 시키고 나머지 2시간은 실외에서 실습교육을 시켰다. 그런데 셋째 시간부터 또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을 마음껏 아니 후회없이 맞으며 계속 해서 교육을 강행해 나갔다. 오후에는 이발(理髮)을 하고 본부에 돌아오니 포대장은 나더러 병사들의 군기순찰 적발되면 책임을 지고 여하한 처벌이라도 받겠다는 각서를 쓰내라고 한다. 조금 기분 나쁜 일이었지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예” 쓰겠습니다. 하고 써주어 버렸다. 오늘도 12시간 이란 나의 인생은 또 무사히 마친 셈이었다. 나는 저녁에 병사들의 교육을 좀 의논한후 집으로 들어왔다. 아무리해도 초라 할 수밖에 없는 나의 생활이라고 여겨질 뿐이다. 큰 덕(德)으로 살아갈 수 없을까?

1967.1.13.(金)맑음:

맑은 날씨였지만 몹시 차갑고 살갗을 가만 두지 않는 찰기가 따가운 날이었다. 오전에는 4시간 줄곧 실내에서 교육을 시켰고 오후 2시간은 실외에서 실시 했는데 피교육자인 병사들이 모두 동상(凍傷)에 걸릴 것 같아 실습조 를 제외하고는 방한(防寒)운동을 시켰다. 퇴근시간이 되자마자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퇴근해서 집에서 밥을 먹고는 다시 부대로 들어갔다. 우리 지휘소대원 중에 병사 2명이 제대 한다고 병사들이 회식을 마련했다. 그기에 내가 참석 하기로 되었다. 그러고 있는데 저녁때쯤 신병(新兵) 한사람이 탈영(脫營) 하려고 했다. 현지 포대지역에서 이탈(離脫)했기 때문에 포대(砲隊)분위기가 도저히 회식 분위기가 될 수가 없었다. 나는 주번당직도 아닌데도 기분은 내가 당직담당인 심정이었다. 주번당직인 金소위와 함께 어떻게 해서라도 찾고 싶었다. 주번 계통을 통하여 상부에 보고할가 하다가 계속 전화가 통화 중 이므로 보고되지 못했다. 마침내 누가 행정반의 문을 두드리기에 혹시나 하여 들어 오라고하니 우리가 바로 찾고있든 그 병사가 아닌가! 얼마나 반가웠든지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알아본즉 너무도 추워서 왔다 갔다 하다가 부득이 도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울기도 하고 벌벌 떨고 있기에 나는 달래며 괜찮다고 위로하며 안심시켜 주었다.

1967.1.17.(火)맑음;

온종일 신병교육을 시켰다. 오전에는 실내에서 오후에는 실외에서 저녁에는 일반교육 말하자면 사회교육/학교교육 이다. 또 약30분간은 제대자 회식시간을 내주었다. 무엇인가 바쁜 시간이 계속되고 있다. 한밤중에 대대본부에서 비사격(非射擊) 훈련 지시가 내려왔다. 그런데 밧떼리 소모가 다되어 모든 훈련이 능률적으로 수행되지 못했다. 겨눔대, 포대경(砲臺鏡), 측각기(測角器) 등등 불빛이 보일 리가 없다. 이 밧떼리(충전지)에 관한 것은 지휘소 소대장 나의 소관 이었다. 담당병사를 시켜서 확인해보니 A급품 10개를 제대장병이 가져갔다는 것이다. 화(禍)가 치밀어 올랐지만 참았다. 난로옆에 앉았다가 야간 순찰을 한바퀴 돌았다. 한밤의 날씨는 나의 귀 끝을 따갑게 몰아쳤다. 나에게는멍청한 날이기도 했다.

1967.1.18.(水)흐림;

날씨가 좀 풀린 것 같다. 아침에는 포대의 분위기가 뒤숭숭하다가 나중에 풀렸다. 나는 아침식사도 못한 체 오전2시간 신병교육을 맡았다. 점심시간까지는 FDC(상황실)에서 책을 좀 읽다가 오후에는 내무반 환경정리 에 달라붙었다. 오늘 완료 하기엔 좀 어려운 일이었으나 저녁때까지 결국 해내고 말았다. 하로가 뜻 없이 무엇을 했는지 막연히 지났다. 요즘은 마음이 항상 우울하고 항상 적적(寂寂)하고 그렇게 시원스런 일이 없다. 다만 순간순간 스스로의 기쁨을 느껴야만 했다. 저녁에는 환경정리에 적극 정성을 쏟아 “콤프레샤”를 작동한 병사에게 술을 한잔 나누었다. 그리고 몇몇의 제대할 장병 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나는 잠자리에 누울 준비를 했다. 너무 피로하여 온종일 시달렸던 기분이다. 구태여 하루의 뜻을 부가해서 지나기가 이젠 머리가 더욱 복잡한 것 같다. 내 지금 나이 음력으로 만25세 이다. 자꾸만 나이가 먹혀 들어가고 있다. 나 역시 아무런 감각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1967.1.19.(木)맑음;

내 몸은 바쁜 일과와 야간근무 그리고 회상과 고뇌로 이젠 완전히 지쳐 버렸다.피로하고 노곤한 육체를 억지로 내 자신을 무겁게 끌고 가고 있다. 내가 한번 아프기 시작하면 내 몸둥아리는 조만간 knock-down 되고 말 것이다. 낮에는 온종일 교육 저녁에는 야간근무 그러나 기다려지는 것은 내일은 주번사령이 끝난다는 사실이다. 저녁에는 사회 기독교회 목사(牧師)를 초청(招請)해서 포대장님 이하 온 장사병들이 함께 예배(禮拜)를 보았다. 오늘 역시 지시가 많았지만 기꺼이 하기는 싫었다. 내가 피로하면 병사들도 피로 하겠지. 저녁10 시경 나는 평일에 비해 다소 포근한 겨울밤의 달빛을 등에 업고 대대 전지역을 하나 하나 순찰해 나갔다. 손전등(flash)을 손에 들고 나갔지만 강력히 비춰온 달빛에 손전등 빛은 무색하게 되었고 오히려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기분이었다. 수하(誰何)요령점검/취침상태 점검 등을 모두 마치고 포대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잠자리에 들어갔다.

1967.1.20.(金)맑음:

마음이 개운하다. 주번사령의 근무가 끝났기 때문이었다. 이발(理髮)도 하고 조용한 시간도 가져 보았다. 상황실에 앉아서 “행복에의 초대” 란 책을 읽어본다. 제1장부터 재미가 있었다. 사랑의 고백과 정복을 대화식으로 엮어져 있어 퍽 흥미로웠다. 한편 포대(砲隊)에서는 바빴다. 그러나 주번당직이 아닌 나는 내무사열에 대비하는 다른 장교에 비해서 여유가 있어 혼자서 생각나는 대로 노래도 흥얼거리고 했다. 오후에는 천천히 콘노래를 부르며 숙소로 퇴근했다. 집으로 걸어오는데 마침내 당번 사병이 마중을 나와 내가방을 들어준다. 나는 괜찮다고 사양했드니 자꾸만 들겠다고 한다. 나는 못 이긴 듯이 놔두었다.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책을 뒤적거려 보았다. 오늘만큼은 한없이 기쁜 마음을 가져보자. 너무 미래를 걱정 말고 오늘의 즐거움을 어디한번 느껴가며 지내는 것도 인생에 있어서 적지 않은 멋이 있을 것 같다. 아아 기분 좋다고 소리쳐보자. 어떤 의미에선 멍청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정말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 된다.

한밤중에 하느님께 독백:

하느님! 인간은 항상 교만해서 당신처럼 조용히 살수는 없는 것인가 여겨지군요. 그러나 하느님! 다시 한번 인내와 용기를 당신에게 염치없이 바라고 싶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회개해도 죄는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산다는 것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서 죄없이 살수 없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어찌하오리까? 나의 하느님!

1967.1.25.(水)흐린 후 맑음:

포근한 날씨다. 나는 좀 일찍 부대에 출근했다. 포대장(중대장)의 지시에 의거 교육에 들어갔다. 그때 포대장은 서울에 있는 친구 결혼식에 나간다고 했다. 오늘 교육은 별 강의 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자습시간을 많이 주었다. 동시에 나도 공부를 좀 했다. 나머지 일부 병사들은 부대 주위에 울타리 공사를 하기 위해서 장벽 자재를 해 오게끔 차량 한대를 배차하여 산으로 보냈다. 부대내에는 장교 PX 에 새로 꾸민 당구장이 말끔히 마련되어 있었기에 대대참모들은 먼저들 왔어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나는 옆에서 구경하다가 이발소에 가서 이발을 했다. 그리고 오후 4시경에는 장교교육이 있었다. 내일 포병사령부에서 장교 테스트 가 있다고 모두들 예비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관심 없다는( I don't care much for it.) 생각으로 일찍 퇴근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앙드레 모로아” 원저를 모두 읽어 치웠다. 오늘따라 밤하늘의 달빛은 맑고 밝기만 했다.

1967.1.26.(木)맑음:

인생은 죽음을 향하는 한 토막의 꿈이라고 하였던가요. 아니면 죽은 이후가 꿈인가요. 신(神)이신 하느님!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고독한 생각에 젖어 있어야만 합니까? 좀더 즐거운 생각을 가질 수 있게 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남처럼 나도 뛰고 싶고 떠들고 싶고 외치고 싶습니다만 이제 내 자세가 굳어서 잘 되지를 않는군요. 요즘 나에게 스쳐 가는 먹구름 같은 사고방식 및 아이디어를 神의 이름으로 제거해 주옵소서. 나는 조용한 시간이면 언제나 당신을 부르고 싶군요.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대학교 1학년때와 같이 한가지 일에만 전념 하도록 권능을 부여해 주옵소서. 나 역시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내 육체가 살고 있는 것이 한순간에 불과한 일이지만 이 순간 을 즐겁게 지날 수 있도록 神이여 기회와 인내와 용기를 주옵소서 오늘 저녁은 죄 많은 저 이지만 포대(砲隊) 전사병들과 더불어 목자(牧者)를 모시고 함께 예배(禮拜)를 보았습니다.

1967.1.27.(金)흐림:

오늘 역시 신병교육으로 지쳤다. 나 역시 군사학에 똑바른 실력도없이 교육을 시키려니 마음속으로 많은 가책을 느낀다. 오후에는 교수연구 강의가 있었다. 나는 신병 교육을 시키다가 갑자기 뛰어나와 준비도 하지 못하고 여러 장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강의를 진행 했는데 약 30분 하다가 도중에 부대장이 나에게 불발탄을 던졌다. 조교도 없다느니 이해가 어렵다고 하면서 군대식의 불문을 열었다. 장교대 장교가 말이 아니었다. 그기에 앉아있던 모든 장교들도 당황한 표정들이었다. 교수연구 강의가 내가 이 부대에 온 이후 처음으로 하는 것 같았으며 또한 내가 그 첫 번째로 걸려든 셈이었다. 나 역시 기분이 몹시 상했다. 그리고 내일 다시 하라고 했다. 조금 있으니 다음주 금요일 다시 하라는 것이었다. 저녁에는 반가운 일이 한가지 있었다. 외박 미기로 약 20일동안 탈영상태에 있든 병사가 데리러간 중사들과 함께 귀대 했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인간보다 행세 가 너무 미웠다.

1967.1.28.(土)눈:

산과 들 모두가 눈으로 쌓였다. 아침에 약 30분 늦게 출근했다. 포대장은 자기 집에서 김치를 좀 가지고 와서 먹어 보라고 했다. 그리고 오전에는 미기(귀대가 늦은 병사) 병사를 묶어놓고 全 포대(砲隊)의 병사들이 차례로 때리게끔 포대장이 시켰다. 정말 가엾고불쌍한 느낌이지만 그 병사는 한 인간으로서 보다 그 행위를 미워해서 다시는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게끔 했다는 것이 포대장의 복안 이었다. 나는 제설작업(除雪作業)을 한다고 때리지를 못했지만 그 죄과에 대해선 신상필벌(信賞必罰)로 다루고 싶었다. 인간이 인간을 배신(背信)해서 저지른 일 이었고 그렇게 해서 오늘날이나 옛날이나 인간이 인간의 적을 만들어 싸우게 되었고 또 그런 방식으로 싸워 왔던 것이었다.

역사 기록에서도 수제자 이신 “베드로”가 “Jesus Christ”를 배반했고 세기전의 “Brutus“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가까운 친구 ”줄리어스시-저” 를 배반했고 박정희 정권의 김제규 정보부장이 박대통령을 시해했던 것은 인간 스스로의 자가당착(自家撞着)的인 문제일까? 역사의 Irony 일까? 인류의적이 다름아닌 인류라고 주장한 역사철학자 토인비 학자의 말씀이 몰바른 판단인가?

내일은 음력으로 내 생일이다. 나보다 내 어머님/아버님을 더 기쁘게 해야 하지만 내가 이곳에 있는 이상 포대 소대원 들에게 선물 이라도 주어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1967.1.29.(日)흐림(음력 12월19일):

음력으로 내 생일 날이다. 무엇인가 기쁘다. 아침 식사를 받아놓고 오래도록 기도를 했다. 더욱 의미심장하게 밥을 먹고는 부대에 들어가서 나의 소대원들에게 비스켙 1통씩을 모두 나누어주고는 오늘은 내 생일날이다. 공포하니 소대원들은 “아니 우리들이 축하 드려야할텐데” 라고 이구동성이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희들은 배도 고프고 돈도 없다. 무엇인가 주는 재미가 좋았어 했든 것이다. 무엇이고 도우고 싶은 것이 나의 심정이었다. 그리고 숙소에 들어왔어 꼬마 와 나의 당번에게도 각각 나누어 주었다. 비록 집에 있지만 기쁘기는 그 이상 비할 데가 없었다. 다만 내가 돈을 크게 벌어서 부모님을 모시지 못한 것이 나의 25년간의 나이가 따분한 느낌이 든다. 벌써 내 나이 26세로 향하고 있다. 그 동안 나는 무엇을 해 왔을까?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 그리고 육군장교 중위(中尉)도 금년으로 굳빠이 또 새로운 학문으로 무엇을 어떻게 메워 나가며 보람찬 일을 할까...... 오후에는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소대원 두 병사가 막걸리/빈대떡/사과를 사들고 왔어 소대장님의 생일이 너무 허전하다고 하며 들고 왔다. 나는 술이 오는 바람에 더욱이 아무 것도 없는 자기들이 정말 성의는 고마우나 조금 속으로 화가 났다. 내가 내 돈으로 장만하지 않는 이상 기분이 좋을 리가 만무하다. 그렇지만 너무 지나치면 그 성의를 해칠 것 같았다. 주인집 아저씨와 함께 마셨다. 주인 아저씨 말씀 너무 청백(淸白)해서도 못쓴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고지식한 정의를 내세우지는 아니 해 왔다. 내 아버님이 너무도 결백해서 말하자면 너무 맑은 물에는 고기가 안 따른다고 하듯이 나 역시 그것을 지양(止揚)하는 방법으로 인생살이를 모색해 가고 있다. 그런데 어쩐 일인가 그 술을 마시고 났어 머리가 아프고 온 몸이 좋지 않았다. 오히려 병(病)알이 하게 되었다. 병사들도 나를 만지고 야단이었다. 오늘 나는 조용한 생일을 보내려고 했는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는 아이들과 노래를 합창을 하며 기쁘게 시간을 보냈다.

1967.1.30.(月)흐림:

오늘의 일기는 익일새벽에 적어본다. 오전엔 교육도 없고 해서(전방부대는 교육없는 날이 없다 시피 한다. 병사들을 그냥 놀게 할 수 없기 때문일 게다.) 상황실에 대기하고 있었는데 정든 포대장이 월남(베트남)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나를 포사령부 신임 소위 구대장으로 발령이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후 1시에 포사 작전과로 들리라고 했다. 나는 포사(포병사령부)에는 무척 가기를 싫어했다. 더욱이 구대장을 명하는 것 자체가 몹시 싫었다. 명령이 었으므로 그냥 버틸 수도 없었다. 좌우간 포사(咆司)는 다녀왔다. 저녁에는 포대장의 송별회식이 있었다. 이임(離任) 포대장이 우리 대대 근무하는동안 많은 혁신이 있었다. 내무반정돈/군기면/병사들 사기 앙양면(昻揚面)등등 이었다. 인간은 누구든 일장일단이 있듯이 구태여 단점을 지적(指摘)한다면 영웅식의 과격파 였다. 정말 정의란 것에서는 암암리에 통했다. 이 시간 바같에는 눈이 하얗게 덮인 위에 달빛이 맑은 하늘에 고요하게 찬란하게 멀리서 비춰오고 있었다. 적막에서 오는 등불처럼 비추어 주고 있었다.

1967.1.31.(火)흐린 후 맑음:

신구(新舊) 포대장 의 인계인수 하느라고 매우 바쁘기도 했다. 나는 속으로 좀 섭섭한 심정 이었다. 포사령부에 갔더니 아직 교육이 시작이 되지도 안 했는데 나는 다음 명령을 받기 위해 대기했어나 아무런 소식이 없어 우두커니 서 있기도 하고 앉아 있기도 하며 시간을 때우다가 퇴근시간이 되어 퇴근 하고 말았다. 전 포대장의 숙소를 늦게나마 들리려 했으나 포대장이 안 계신다고 하기에 그냥 돌아왔다. 그리고 숙소에 와서 저녁을 먹고 신문을 좀 보다가 오늘은 아무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날인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오후에는 내 아버님 진갑에 내가 참석 못하겠기에 얼마 안 되는 금액 이지만 성의의 뜻으로 약간을 송금했다. 그러고 나니 한결 마음이 홀가분하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진실로 잘 될 수 있다면 신(神)께서도 동정과 오히려 부러워할지도 모를 일이 아닐까 하고 외람 되게 생각 해본다. 가정, 순수한 가정, 포근한 가정, 웃음의 가정, 유모어의 가정, 나라를 가정같이, 이것이 나의 이상(理想)의 꿈이다.

1967.2.1.(水)맑음:

아침 9시에 포대 연병장에서 신구(新舊)임 포대장과 포대요원 전원이 기념 사진 촬영을 했다. 그리고 포대장은 포병사령관에게 신고 하러 가시고 나는 인사과 에가서 급여원부/통장(通帳)/특명지(特命紙)를 받는다고 좀 늦게 포사령부에갔다. 거기서도 포대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나는 그곳에서 일을 했지만 서먹서먹하고 어색했다. 그리고 포사령관 전속부관으로 계시던 “鄭철일” 중위님이 어제 날짜로 제대 하셨다는 것이다. 몹시 부러웠다. 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장교생활 하려니 많은 장애가 많은 것 같다. 확실히 군대 기피가 내가 입대할시는 무서웠다. 그리하여 오늘 내가 이렇게 그날의 미약한 용기를 원망하게 되었다. 내 나이 벌써 만25세 정말 아찔하다.

1967.2. 2.(木)맑음:

평일 보다 새벽 일찍 밥을 먹고 통근차로 “連川;연천”마을 까지 갔다. 거기서 또 버스를 갈아타고 “全谷;전곡”마을에 갔다. 또 거기서 트럭을 타고 군단 하교대(下敎隊)에 도착했다. 내 생각에 좀 늦지 않았나 하고 조심스레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포병장교는 한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한 시간을 더 기다려도 오지를 않았다. 그런 대로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의 속성(屬性)은 너무도 내적인 연구, 연구! 이것 역시 신경을 날카롭게 하는 낱말 어였다. 나도 군복을 벗고 사회인처럼 되어보자. 오늘은 어쩐지 군복이 거추장스럽고! 원망스러워! 아무리 원망해도 나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는 것. 26연간 나는 무슨 길로 걸어 왔기에 오늘과 같이 이렇게 나의 꿈/희망 앞에 고뇌와 번민의 시간을 많이 할애해야 하는지... 어떻게 생각하면 내 자신이 답답하기도 하고 가엽기도 하다. 누가 이 마음을 알겠나마는! 가끔 나 혼자 자문자답하는 독백 이기도 하다. 군복도 3년 아니면 2년 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1967.2.3.(金)맑음:

군단 하교대(下敎隊) 까지 가는 길에 차가 없었어 몇 키로 이든 가내 마구 마냥 걸어보았다. 그리고 걸어가면서 여러 가지 궁상과 공상같은 것도 해보았다. 그러다가 BUS를 탔는데 “全谷;전곡”마을까지밖에 가지 않았다. 차량을 기다리는 것이 더욱 추운 것 같았다. 계속 길을 걷다보니 우리 대대 OP차가 나타났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타고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학생장교는 내무규정을 만든다고 온종일 진땀을 뺏다. 점심을 사오지 않아서 민간식당에서 점심을 사먹고 그 근처에 방을 얻으려고 여쭈어도 보았다 간단하지 않았다. 다음주 부터 하숙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있으니 나의 당번이 우리 지휘소대병사 한 명이 전속(타부대로예속)가기로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저녁에 내 숙소로 나왔어 술을 몇 잔 하기로 결정하고 몇 사람 나오라고 했다. 나 역시 몇 잔을 마셨다. 그리고 곧바로 잠자리에 누었다.

1967.2.4.(土)맑음:

일주일간 연구해온 교육준비를 교관요원 일동은 포사령관님께 브리핑(Briefing) 했다. 마치고 全谷을 나와서 함께 식사를 하고 朴대위 님 과 나는 짚차로 부대로 들어와서 휘발유를 몇 가롱(gallon) 얻어 넣고 다시 “蓮川;연천” 이란 곳을 달렸다. “東豆川;동두천” 까지 함께 타고 가기로 했는데 朴대위께서 “蓮川”에서 업무가 좀 있다고 하시기에 나 혼자 버스를 갈아타고 서울로 나왔다. 오늘은 서빙고(西氷庫)에서 洪소위 와 같이 내렸는데 내가 버스 종점을 잘 몰라 당황했는데 洪少尉는 직접 표를 사들고 나를 잘 인도해 주었다. 집에 도착했더니 저녁 여덟시 였다. 늦었으나 저녁을 먹고 형님/형수님 이 고향 다녀오셨다 기에 고향소식을 듣기도 했다. 조카들과 장난을 치며 지내다가 시간이 한 밤중이 되어 그냥 잠을 잤다. 매우 피곤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이날 나는 일기장을 부대 숙소에 두고 왔기에 이렇게 그 다음 다음날에 쓰고 있다.

1967.2.5.(日)백설(흰눈):

오늘 새벽 목욕탕에 가는데 그 白雪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목욕 마치고 나오니 백설이 수(數) 센치 가량 쏟아 부었는지! 온 서울長安에 가득 찼다. 아침을 먹고 나는 형수님과 극장구경을 가기로 했다. 스카라극장에서 감상했는데 영화제목 지금 잘 기억 나지 않는다. 어쨌든 스릴영화였다. 감상후 함흥 냉면 집에서 냉면을 형수와 함께 먹었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후암동 형수님 친척댁인 “金永千:김영천“ 씨란 댁이었다. 나는 조금 주저하다가 들어갔다. 그 분으로 말하면 자유당때 검찰총장 민주당때는 법무부차관 지금은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법계통에 있는 모양이었다. 말은 많이 들었지만 직접 대면하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듣기보다 좀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나 역시 좀 두려워 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청렴결백의 소문은 많이 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부대숙소에 들어와서 이렇게 주절 되어 보았다. 또 내일을 기다린다.

1967.2.6.(月)흐림:

부대앞 숙소에서 새벽에 차를타고 군단 하교대(下敎隊)로 왔다. 별로 할 일은 없었다. 점심때는 하교대(下司官 敎育隊)앞 마을에 하숙집을 정해두고 밥은 별도 식당에서 식사하기로 했다. 저녁 식사를 하고 몇 시간 방에 있으니 나의 원 소속부대 당번이 나의 개인짐꾸러미를 가지고 왔다 기에 짐을 챙기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다가 兵士들은 먼저 잠들게 하고 잠이 오지 않아 나 혼자 성경을 읽어보았다. 오늘을 즐겁게 생각하며 지내보자 지나친 미래 걱정보다 오늘을 보람된 오늘을 만들어 가보자 그렇다고 방탕과 방종의 오늘을 즐기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요즘 내가 여러 가지 번민에 휩싸여 아무 뜻도 없이 무작정 먼길을 추위도 잊은 체 자꾸만 걸어가기 만 한다. 걷는 것이 나도 모르는 취미가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산책이 나의 취미일까? 습벽일까? 아무런 고상도 없이 아무런 느낌도 없이 걷는 것이 나의 정서가 되고 말았다. 또 언젠가 이와같이 산책해 볼가 한다.

1967.2.7.(火)또 白雪이:

나는 이렇게 글을 담아본다. 아- 아-- 그 고요한 백설(白雪)이 또 내리고 있다고 나는 흰눈을 마음껏 맞으며 도로를 따라 목적지까지 마음껏 걷는다. 콧노래도 부르며 길 한복판을 나 혼자 걸었다. 모두가 나만을 위한 찬란한 흰 종이를 한없이 뿌리는 환영군중으로 보였으며 한없는 손과 몸을 흔들며 답례(答禮)를 하고 싶은 감정이었다. 나는 내 옷을 백설(白雪)로 함뿍 적셔 한 겹 두 겹으로 짊어지고 한없이 가고 싶었다. 명일이 아버님 진갑 이신데도 부대에서는 보내주지를 않는다. 비록 매인 몸이지만 나는 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장교는 사병과 달라서 책임이 중하다는 것이 또한 피할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괴로웠든지 나는 막걸리를 몇 잔 마셨다. 나는 때때로 괴로우면 한 잔씩 걸치기를 해 왔던 것이 습벽이 되어왔다. 순간이나마 나를 잊으려고 했다. 바카스/마약의 “판도라 상자“속의 시간을 느끼는 것 같으면서도 괴로움은 가시지 않는군 또 나는 이러한 질문을 해본다. 나는 무엇을 할 것이었나, 내가 양심의 그때는 무엇을 꿈꾸고 왔던 가고, 아직도 그 꿈은 작아지지 않았다. 행복의 정의 와 행복의 표준이 어디에 있는지, 기술자/학자/사법가/문학가/철학가/과학자/의학자/정치가/외교가 그 무엇이 나의 이상을 충족 시켜줄 것이며 동시에 나 혼자의 경우와 내 동반자가 있는 경우의 행복은 어는 것이 더 나을 것 이인가....... 그러나 이미 내 나이는 만26세로 향하고 있고 무엇밖에 할 수 없는 것도 결정되어 있다. 애초에 나는 짧게 그리고 굵게 살고 싶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만년의 경우까지 고려해서 여하한 행복을 소복한 웃음 속에 인생을 차려 나 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요즘 나의 복안이며 기어코 최초의 나의 이상을 실현 하는데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고 싶다. 그리고 오늘은 내가 나의 미래를 위한 공부를 얼마만큼 했는지 의문(疑問)이다. 이 일기장(日記帳)에 토로(吐露) 해본들 그것 역시 소극적인 독백이 아니었던가 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운명에만 맞길 수 없는 것이 현재의 나의 길이기도 했다. 그 운명에 만 맞길 수 없다.

1967.2.8.(水)맑음:

서울을 간다 온다 할 때면 대기 시간이 많았고 보람없는 시간을 낭비하기 마련이었다. 아직 내가 내 자신을 생각해도 내 좌표를 좀 잃어버린 것 같았다. 때때로 생각나는 것은 현실을 도피하는 것 같은 염증과 실증 이다. 그러기에 서울을 자주 나가는 동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서울에 나가서도 큰 볼일은 없었다. 다만 닥쳐올 미래에 대한 자극제를 얻기 위한 점도 있다. 확실히 서울은 생존경쟁의 마당이기도하다. 내가 처음 전방부대에 전입하여 전방 관측소 산골자기에 있을 때보다는 친구들에게 그렇게 편지를 많이 하지 않는다. 그것도 별로 그렇게 좋을 것 같지 않았다. 이야기도 많이 하기 싫고 묵묵한 발걸음만이 나를 만족토록 해 줄 뿐이었다. 나를 해부해본 나는 정말 무한한 허무에 잠겨지기도 했다. 단지 젊다는 죄 때문에 이렇게 얽매여 살고 또한 고통을 밥먹듯 각오해야만 되는 것 인가도 모르겠다.

1967.2.11.(土)맑음:

겨울이 아직 떠나지 않고 있다. 차가운 날씨로 계속 위협하고 있다. 나는 일찍 부대에 출근했다. 그리고 나의 할 일을 이것저것 챙겨 보았다. 오늘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교육에 대비해서 포사령관의 최종검열이 있었다. 오후에는 우리 교관요원들의 수고를 보답하기 위해 식사회를 마련해 주셨다. 나는 배부르게 먹었다. 그리고는 곧장 하숙집으로 차를타고 왔다. 저녁을 먹고는 교회에가서 오르간을 좀 타고 싶었다. 교회에 갔더니 학생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나도 함께 불러보았다. 그러나 죄의식감이 느껴지는 것은 내가 아직 담배를 피우고있다는 사실이다. 내일 교회예배 참석하라고 학생들이 권유한다. 그러나 내일도 나는 부대에 근무해야될 형편이다. 내 마음 그래도 神을 끝없이 찾고 있다. 언젠가는 완전히 찾고야 말 것이다.

1967.2.12.(日)맑음:

훈훈한 인간의 마음에까지도 찬바람이 스며들 것같이 날은 차가워 만 갔다. 나는 온종일 분주하게 바빴다 현지 임관 소위(少尉) 들의 오늘부터 시작되므로 여러 가지 안내준비가 몹시 바쁘기만 했다. 그들에게 관물정돈을 하게 하고 기타 여러 가지 지시를 하기도 했다. 오늘 나는 높은 분들에게 많은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내가 군대 염증을 일으켜서 가 아니라 내가 제대 할 몸이라는 것을 높은 분들이 알기에 그것을 미끼로 좋게는 보아주지 않은 점도 있다. 물론 내 자신의 처신도 좋지 않은 점도 있었지만 항상 마음은 괴로웠었다. 지금까지의 군 생활을 훑어보아도 나는 항상 불안속에 살아왔다는 것이 오늘까지 숨김없는 고백 이라고도 생각된다. 저녁에는 교육온 장교들을 약2시간 외출을 시켰고 높은 사람들의 지시에 의거 나 역시 숙소에 있는 침구를 부대로 옮겨놓고 부대에서 숙식을 함께 하기로 되었다.

1967.2.13.(月)맑음:

추운 날씨였다. 허둥지둥 피교육 장교들의 교육준비를 하느라고 바빴다. 그러나 일단 일과 시간이 시작되면 구대장들은 시간의 여유가 있는 셈이다. 나는 피교육장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관찰하여 오후학과 출장시엔 지적사항을 전달했다. 대체로 순순히 말을 잘 들어주었다. 저녁에는 구대장들이 직접교육을 시켜야만 하기 때문에 거기에다 취침점호 까지 시켜야 하기에 피곤하기도 했다. 우리 구대장들은 취침을 시켜놓고 부대앞 마을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담소하다가 저녁12시가 가까워 나는 숙소로 들어가고 다른 구대장은 부대로 들어갔다. 방이 뜨끈뜨끈 하기에 부대에서 자기란 아깝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방안에 들어가 누웠다. 저녁에 이 일기장(日記帳)을 정리할려고 하니 그것을 마침 부대에 두고 나왔기에 익일(2/14) 이렇게 적어보고 있다.

1967.2.14.(火)맑음:

피교육장교들을 학과출장을 시키고 난 다음 나는 내무반에 들어가서 관물정돈 및 여러 가지 지적사항을 통보하고 벌점(罰點)을 매기기도 했다. 식사도 함께 하고 하며 나로서는 후보생 생활로 다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군생활에서 안일을 구한다는 것은 모순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때로는 그렇게 좋은 위치를 구해서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든 것은 방법론과 새로운 idea 에 있는 것 현재 내가 빈털터리임에는 틀림이 없다. 초라한 실력 따분한 생활로부터 방금 뿅 하고 날아갈 수 없는 것이 또한 인생 살이기도 하다. 저녁에는 야간교육을 시켰고 취침점호를 취하고 난 다음 좀 늦게 침구 속으로 들어갔다. 잠도 잘 오지 않고 해서 혼자서 연속된 침묵속에 여가지 사항들을 분석해본다.

1967.2.15.(水)맑음:

추위도 오래 계속 되고 있다. 속절없는 생활 이기도하고 어떤 의미에선 보람있는 시간이기도하다. 오늘은 왠지 일기도 뭐도 다 귀찮은 기분이다. 한심한 마음뿐이다. 그저 따분할 뿐이다. 지금 내 마음은 방종의 세계를 헤매고 있다. 저녁에는 피교육자들이 또 무엇을 사 가지고 왔다. 나는 경고했다. 다시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하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러한 일이 있으므로 해서 우리의 처신이 곤란할 것 같아서 즉각 中止하라고 했다. 저녁에는 몇몇 지적된 장교에 대하여 특성 훈련을 시켰다. 그것도 구보(뛰기)였다. 왜, 이렇게 시켜야 할 가 나 역시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았다.

1967.2.16.(木)또 백설:

아침엔 좀 포근한 날씨가 계속되다가 오후부터 갑자기 함박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 추위는 다른 평일에 비해 우리 나라의 대륙성기후 3한(寒)4온(溫)을 무시되어 버린 양 연달아 5일간은 추웠다. 오늘 오전 11시에는 군단에서온 정훈참모가가 대통령 연두교서를 설명했다. 1차5개년계획을 토대로하여 2차 5계년 계획(1971연대에 끝나는것)에 대해서 쉽게 그리고 고무적(鼓舞的)으로 강연을 했다. 내가 듣기에도 속시원한 기분이었다. 밖에서는 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비록 차거운 눈송이지만 그 속에 수없는 수많은 예술작품이 흘러내리는 것 같다. 그런 그림(Screen)은 지금뿐만 아니라 그 옛날에도 느껴왔으리라. 인간들의 공통된 감정이 역사를 뛰어넘어 다니고 있다. 내일 부턴 좀 따뜻한 날씨가 오겠지.

1967.2.17.(金)맑음:

아무도 내가 이렇게 번민속에 시간을 메워 나가는 것은 모를 것이다. 내 자신을 세월 따라 흘러가는 물결 속에 아무렇게나 내버려 팽게칠수가 없는 것이 내 욕심 내 욕망이기도 하다. 무엇 때문일까? 하고 자문도 해본다. 내가 어떤 대화자 에게 이러한 내 얘기를 한들 결론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결론을 내릴 자가 바로 나란 것을 발견하게 되고 만다. 그렇지만 인생을 너무 조급히 생각해서도 안 된다. “理想“(이상) 이것은 성인에게는 정말 매력있는 낱말이야! 어린이 입장에선 공상만화같은 것이지! 때때로 인간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하여 “이상(理想)“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만 주절 될 때가 있다. 현실보다 상상의 세계에서 활동하는 테마 이기 때문이겠지! 나도 그 뜬구름의 멤바 속에 포함되어 부(富)까지도

영어단어중에서 가장긴 단어 “경시(輕視=floccinaucinihilipilification)”하는 회원의 한 사람 임에 틀림없다. 눈이여! 나의 귀여! 나의 마음이여! 나의 입이여! 내가 왜 이렇게 갑갑하기만 할까? 그런 대로 세월은 흘러가고 시간도 흘러가네, 내 나이 만25세의 연륜에 다 달았고 나는 날카로운 신경에 발걸음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네.

1967.2.18.(土)맑음:

토요일이다. 모두들 외출을 나가고 있네. 나는 부대에 머물며 주번근무를 해야되네. 나의 학문이여 나는 무엇을 이때까지 갈고 닦아 왔던가. 그리고 무엇을 위하여, 무엇 때문에 나의 시각과 청각이 이 사회를 어떻게 관찰하고 있는지. 현재에 내가 입에 풀칠하고 있다는 것 이 자체만은 외면할수없는일. “나“ 란 “국가“란 큰 틀 속에 부속품으로서 나의 기능을 원만히 해나갈 때 이 크다란 기계도 원만히 움직여 나아가지겠지. 나는 나다. 우선 내 자신이 성실을 기해야된다. 때때론 인간이 만들어놓은 神도 긍정하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술도 자기의 신체조건에 맞게끔 마셔도 보고, 인생을 enjoy 해 나가는 것. 그러쿵 저러쿵 하며 다음시간을 기다려 볼가나!

1967.2.19.(日)맑음:

포근한 날이로구나. 아침에는 눈이 내렸고 그리고 교회에 예배보러갔다. 오후에는 부대에 들어갔다. 몇 차례 군단 지휘부로부터 전화를 받고는 집으로 들어왔다. 저녁에는 병력 인솔차 “全谷;전곡“으로 가야할 처지인 것 같다. 하기야 오늘도 부대에종일 근무해야 되지만 조금 융통성을 발동하여 나왔다. 그리고 다방에서 커피를 한잔 마셨다. 한참동안 신문을 얼굴에 뒤집어쓰고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classic music을 감상했다. 그리고 숙소에 왔어 성경을 조금 읽었다. 그런 대로 오늘의 태양도 저물어 가고 있었다. 마음 적으로 다소 기쁜 날이기도 했다. 외출자들이 제 시간에 다 들어올지 의문이다. 이렇게 저렇게 했어 나의 인생의 한 일자(날짜1967.2.19.) 의 낮이 끝났다. 이제는 또 밤이 남았다. 손에 닿는 책을 몇 자 읽었다.

1967.2.20.(月)흐림:

비 올 것도 같고 눈 올 것도 같고 날씨가 그렇게 좋지 않았다. 그런 대로 그럭저럭 하루를 보냈다. 요즈음 나는 매사에 thinking 이 좀 적어졌다. 근무에 시달리면 다방(Coffee shop)에 가서 茶를 마시며 곰곰이 thinking도 해보고싶다. 오늘도 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나곤 했다. 방안에서 종종 가곡/명곡을 즐겨 부른다. 슈벨트의 세레나데, 노래의 날개, 그 집앞,켄타키의옛집, 코로라도의 달밤. 마냥 즐겁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 이것은 내가 생존하는 이상 무시할수없다. 현실을 기뻐하라, 현실에 충실하라, 현실에 성실하라, 현실에 적응하라, 현실의 미(美)를/부(富)를/진(眞)을 축적하라, 때로는 미치광이처럼 떠들어 보라, 때로는 미치광이처럼 웃어도 보라, 때로는 울어도 보라, 그러다가 보면 현실의 아름다움을 느낄 것이 아닌가!

1967.2.21.(火)흐림:

오늘은 어느 때 보다 천천히 출근했다. 엊저녁 꿈이 좋지 않아서 조심해야겠다 하면서 부대에 들어갔다. 산과 들의 白雪들은 조금씩 조금씩 녹았고 땅은 질퍽질퍽 젖어 있었다. 나는 강당에 가서 제일뒷면 남은 책상에 앉아 나의 영어책을 뒤적거려 보았다. 학생들(피교육장교)은 1시간후 야외교육에 출장했고 나는 그대로 남아 책만 뒤적였다. 오후에는 기간장교(교관들)들끼리 저녁내기/커피내기/맥주내기 의 당구게임을 했다. 그 결과 내가 낀 편에서 졌다. 그래서 대접하고는 숙소로 들어왔다. 저녁에는 이따금 부슬비가 내리곤 했다. 아무렇게나한 선악의 추억에 젖기도 했다. 가끔 비가 올 때면 나는 기분이 좋았다. 황야벌판에 내가 있는 곳만 호젓이 울타리 안에 남아있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고나 할까. 그리고 생각에 젖는 것이 기뻤기 때문이었다. 아! 비가 오는구나, 나의 비가 오는구나, 말없는 내 친구가 오는구나!

1967.2.22.(水)비:

이른 봄비가 쉬지 않고 내렸다. 나는 아침 출근길에 우의(雨衣)가 없어 망설이다가 하늘을 우산삼고 온 비를 맞으며 출근했다. 조만간 내 옷은 빗물에 함북 적시고 말았다. 이제 비가 오다니 봄의 안내자로다. 음력 정월 대보름의 달은 어디에 있는지 심술궂은 구름 때문에 얼굴을 내 보이지 않고 하염없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내 옷은 이왕 젖은 것 미친 듯이 비에 젖어보자는 심정이었다. 이 밤이 깊고 저 구름이 벗겨지면 황홀한 달빛이 바쁜 듯 고독한 듯 이 속세(俗世)를 내려다볼 것 같은데 영영 구름은 이 심정을 모른척하고 말았다. 오늘따라 보름달이 유난히도 보고싶든지. . . 이렇게 혼자서 지껄여 보기도 했다. 저녁에는 주인댁에서 조밥찰밥을 해서 초청했다. 나는 그것을 맛있게 먹고 내방으로 돌아왔다. 담배를 피워 물었다가 그냥 꺼버리고 잠들었다.

1967.2.23.(木)맑음:

청명한 맑은 하늘은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이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였다. 개울과 냇가는 어제만 해도 흘러내리든 황토물이 더욱 맑게 좔좔 철철 봄 소리를 뽐내어 뿌려댔다. 내 마음은 한결 더 갓뿐한 것 같았다. 이번 주일은 내내 편하게 지낸 샘이다. 그러나 다음 주일은 또 영내생활 을 각오해야 된다. 저녁 하늘에는 중천에 달이 대보름 달이 답답하고 갑갑한 속세(俗世)를 맑게 밝게 비춰주고 있었다. 나는 한참동안 보름달을 쳐다보면서 어떤 시상(詩想)이 떠오른 듯 몽롱한 감정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어떤 시(詩)를 암송하기도 했다. 오늘은 내 소속 원부대가 그립다. 여기보다는 더 촌락(村落)이지만 조용하고 하로의 피로가 책 속에서 풀렸든 부대앞방을 그리워하고 있다. 이곳은 모두들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마냥 떠들어대기만 한다.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좋은 마을이 아니었다.

1967.2.24.(金)맑음:

못내 아쉬워 기다리든 봄이 멈춘 듯 지나가는 듯 쉬엄쉬엄 골짜기마다 얼굴을 내보인다. 이름 모를 나무들이 움을 돋기 시작하고 저 넘어 보이는 언덕에는 아지랑이가 흘러 넘치고 있다. 나는 걸어서 부대에 들어갔다. 교수부 난로가에서 한참 앉아 있다가 다시 강의실에 들어가 보았다. 거기서 몇 분간 서 있다가 다시 내무반으로 왔다. 빼치카 난로는 강한 열을 발산하며 타고 있었다. 나는 매트레스에 기대어 한참동안 누었다. 그리고 회화책을 끄집어내어서 읽어보았다. 온몸은 그렇게 고된 일도 하지 않았는데도 피로에 지친 듯 오싹했다. 좀 일찍은 시간에 숙소로 다시 나와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마루에 걸 터 앉은체 성경(聖經) 몇장을 묵독해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부대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시냇물인가 개울물인가 졸졸졸 소리도 아름답게 조잘 되기도 했다. 나는 내 발이 물에 적시지 않게 조심조심 돌담을 건너갔다. 하마터면 미끄러질 번도 했었다.

1967.2.27.(月)맑음:

아침 나는 부대에 들어가자 말자 다소 바빴다. 오후에는 갑자기 내가 후방(2군)으로 특명이 났다고 했다. 나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고 뒤통수를 한 대 꽝하고 맞은 셈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내가 누구에게 무슨 배반을 당한 기분이었다. 모두들 나에게 인사가 전방에서 후방으로 가니, 얼마나 좋으냐고 야단들이다. 칭찬인지 비웃는 건지 묘한 감정이었다. 아무튼 나는 달갑지 않았다. 이곳에서 제대를 하고 싶었는데 그것도 내 맘대로 되지를 않았다. 그러나 또 정든 병사들을 남겨두고 나는 떠나야만 했다. 제대하는 그날까지 911대대에서 충실을 다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군대 시스템이란 나의 그런 생각을 이해해 주지 않았다. 나는 또 폐에터 의 산문(散文)의 한 구절처럼 인생 제5막극에서 제3막이 끝난 배우모양 감독이 시키는 대로 다음 순간을 출연할 임무를 지녔는 것 같다. 파견지 피교육장교 들이 나에게 회식을 마련해준다. 나는 갑갑한 목소리로 작별의 인사를 고했다.

1967.2.28.(火)맑음:

갑자기 내려온 특명이므로 나는 설상가상으로 매우 분주했다. 원소속부대(911대대)에 가서 볼일을 보고 다시 파견지로 왔다. 하숙집 주인에게도 인사를 드리고 그리고 다방에서 다(茶)한잔을 얻어 마시고 버스 편으로 부대까지 왔다. 대대장 신고도 끝났고 언제 가겠느냐고 식사를 같이하자고 했다. 나는 저녁 차로 가겠다고 했다. 저녁에는 포대병사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정말 내 맘은 한없이 슬펐다. 요즘의 내 인생행로가 그러하듯이 순조롭게 되는 것이 없었다. 모두가 슬퍼 보였다. 포대에서는 간단한 송별회식연이 마련되어 있었다. 나는 시종일관 침묵으로 명상에 잠겨보기도 했다. 아!- 내 명상의 아름다움이여, 내 명상을 나는 사랑하노라. 내 명상의 사랑이여, 입체적이 아닌 너무도 공상적인 사랑이여, 또 나는 무엇인가 이별, 작별을 고하며 내 가슴을 치고 있네.

1967.3.5.(日)맑은 후 白雪:

오늘은 늦잠을 자고 일어나 밥을 먹고는 오후에 시내 나가서 영화감상/음악감상 그리고 편지지와 편지봉투를 구입했다. 책방에 들렸더니 내가 구하는 책은 없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식사를하고 저녁 11시 가까이 까지 6통의 편지를 썼다. 아직 피로한 기색이고 마음의 안정을 잡지 못했다. 내일 출근하면 보직이 어떻게 내려질지 의문이다. 아무튼 후방근무인 만큼 전방보다는 좀 편안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어디를 가나 자기의 신조(信條)는 버릴 수 없다. 실존주의(實存主義)의 성실(誠實)/진실(眞實)/현실(現實)그리고 충실(充實)까지도 팽개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전라도 광주 땅은 내가 제대할때까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으로 결심도 하였고 그렇게 생각도 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운명의 장난인가 이곳 포병학교로 다시 오고 말았다. 다시 왔다는 사실을 끝끝내 싫어하지는 말아야지. . .

1967.3.6.(月)맑음:

좀 차거운 날씨였다. 포병학교에서는 아직 완전한 보직이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명일 이면 완전히 결정이 난다고 했다. 점심시간에는 포병학교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는 옛날 OBC 포대장을 만나서 인사를 드렸다. 그 포대장은 학생단장님을 만나보라고 하셨다. 찾아 뵙고자 가보았으나 계시지 않아서 그대로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저녁에는 인장도장을 파달라고 부탁하고 증명사진도 찍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 와서는 콧노래를 부르며 책을 주섬주섬 끄집어내고는 그대로 베개로 턱을 받히게 하고 이렇게 지껄여 본다. 이제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회는 모르겠지만 군대에서의 나의 사교/외교는 거의 무지다 높은 사람을 사귀는 것도 Zero(빵점)였다. 그런 점을 나는 자인(自認)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내적인 실력향상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1967.3.7.(火)맑음:

차거운 날씨였다. 학교에서는 포병학교 교수단으로 내 보직명령이 나왔다고 했다. 거기서도 학부결정 때문에 밖에서 오돌오돌 떨기도 했다. 점심때는 도시락을 친구와 반반씩 나눠먹고 나니 배도 고프고 춥기도 했다.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고 나는 교관휴게실에 갔다. 나는 친구들과 담소도하고 열람함에 있는 도서를 한권 한권씩 펼쳐 보기도 했다. 조금 있으니 테레비를 틀어주었다. 내용은 자미가 없었다. 그런데 퇴근시간만 기다려지는 것이 아닌가. 과연 내가 교관 노릇을 제대로 할지 의문스럽다. 그러나 명령대로 해야만 하는 것이 현실 적응이 아닐까 생각된다. 피복카드/저금통장/급여원부 모두 제출했다. 명일 교수단장에게 신고하기로 하고 모두들 함께 퇴근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이불 속에 즉시 들어가서 몸을 녹였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밥을 달라고 했다. 그때 마침 한방친구가 도착하여 함께 먹었다.

1967.3.8.(水)맑음:

오늘 오후 나는 학생단장실에 가서 단장님을 찾아 뵙고 지난날 후의에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단장님은 무척 반가워 했으며 나의 편지를 잘 받았다고 했다. 시종일관 웃으시면서 자주 들리라는 것이다. 나 역시 같은 경상도로서 매우 친밀감을 느꼈다. 내 맘을 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흐뭇한 기분을 감추기 어려웠다. 나는 온종일 기뻣다. 내가 서신을 보낸 것은 예의치례일지 모르지만 그 조그마한 종이 두 장이 이렇게 엄청난 기쁨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렇지 모든 기쁨과 슬픔은 자기 자신이 감수하고 또한 바른걸음으로 나아가며 개척해나가는데 있다고 생각되었다. 오늘 바깥 날씨는 차지만 내 맘속의 날씨는 마냥 따뜻하기만 하구나. 이것 역시 神의 뜻일 것이야! 전능하신 그분의 뜻일 것이야!

1967.3.10.(金)흐림:

비가 올 것 같기에 우의를 갖고 나갔더니 비는 오지 않고 종일 흐리기만 했다. 오전엔 치과에가서 이(耳)를 검사했는데 빼버리는 것이 더 낫겠다고 했다. 그래서 잠시 생각하다가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오늘은 온종일 공백시간이 많았다. 확고한 보직을 받지 못하여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서성거렸다. 교관 휴게실에서 “영원한 사상을 찾아서“ 라는 책을 보니 매우 흥미가 있었다. 오늘도 봉급을 수령하지 못했다. 오후에는 이(耳)가 시리고 허리가 아프고 또 두통이 아프고 온몸이 말이 아니었다. 결국 숙소(집)에 들어와서 일치감치 들어 눕고 말았다.

1967.3.11.(土)맑음:

따뜻한 날씨였다. 일찍 부대에 출근 했지만 해야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77육군 병원 치과에 갈 작정으로 사단 의무실에 확인증을 발급 받아 77육군병원 에 가서 이를 빼 달라고 했다. 명일이 휴일이라 치료할 수 없기 때문에 오늘 수술작업 하는 것은 곤난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대로 빼달라고 졸라 되었다. 결국 부분 마취주사를 놓고 힘들게 이를 빼고 보니 왼쪽 입술이 한시간 후에도 감각이 없었다. 두 시간 가까이 지나니까 몹시 쑤시고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집에 일찍이 돌아와 약을 먹었더니 다소 괜찮았으나 약기운이 떨어지면 아프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녁에는 식사후에 친구와 “Honey-moon" 이란 영화를 감상했다. 오늘 하루는 치과일로 끝난 셈이다.

1967.3.12.(日)맑음:

포근한 날 이었다. 갑자기 날씨가 따뜻하니 감각이 무디어 졌는지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다. 아침식사후 방을 청소하려고 하니 주인 아주머니가 청소를 다해 주었다. 매일요일 마다 한방에 있는 동기 셋 중에서 交代로 자기들만의 친구들이 연쇄적으로 방문하므로 아예 벽에다가 “ 존경하는 분들이여, 이 방은 조용한 방입니다.“ 라고 붙여놓고 그 위에다 확인 사인을 해 놓았다. 옆 친구는 오히려 조소하는 것 아닌가. 나는 응답하기를 -너희들도 나처럼 늙어보면 이렇게 노망하는 글을 쓰게된다.- 라고 조크를 던졌다. 조금 있으니까 그 글귀가 무색하리 만치 교대로 친구들이 찾아왔어 나일론-뻥(화투놀이) 하자고 한다. 나는 할 줄 모른다고 빠졌다. 그리고 3월달 시사영어책 겉 풀에 이렇게 적어보았다. -- “대상이 인간이던 神이던 짐승이던 물건이든 모두 사랑을 진실하게 주고받을 줄 아는 인간이 되어보자.”--라고 무엇인가 풍부한 사랑심을 가져보자고 다짐해보았다.

1967.3.13.(月)맑음:

오전에 77육군병원에 가서 이(teeth) 소재를 했다. 군의관은 이제는 괜찮다는 것이다. 부대에 들어갔어 이발을 하고 오후에는 봉급을 탔다. 그리고 인사처에 좀 앉아 있다가 친구에게 간단한 job을 부탁하고 일찍 퇴근했다. 숙소에서 bible(聖經)을 좀 읽다가 낮잠을 잤다. 퇴근시 숙소에 도착하기 전에 광주시 충장로 도장(刀匠)집에서 도장을 찾고 그리고 내가 전 부대에서 근무를 함께 했던 병사들을 우연이 만나 그들이 제대복 을 입고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란 표정을 하며 몹시 반가워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다방(茶房)에 가자고 하니 그들은 막걸리 집으로 가자고 한다. 아무튼 막걸리 집에 들어갔다. 나는 술을 따루었다. 그런데 그날 따라 내 치아(齒牙)가 좋지 않아서 아파서 막걸리를 먹을 수가 없었다. 모두들 착실한 병사들 이었다. 오늘저녁에는 주인집 초등학교 6학년 계집아기를 한시간 가르치던 중 옆 친구가 와서 보고 있던 중 아이들이 질문에 답을 하지 않는다고 야단을 쳤더니 그만 그 아기들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줄줄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좀 당황했고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1967.3.17.(金)흐린 후 비:

광주 포병학교에서 경북안동에 위치한 36예비사단으로 전보되어 안동으로 왔다. 시내에서 하루 여관에 숙식하고 아침에 36사단으로가는 통근차를 탔다. 몇 분도 안되어 차량은 부대에 도착했다. 나는 먼저 보충대를 들렸다가 부관부에 갔다. 어제 날짜로 부임해야 되는데 오늘 왔다는 보고가 올라갔다. 나로서는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발령 받자말자 온종일 달려서 버스에 시달려 오고 보니 이렇게 되었다.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런데 부관부(副管部) 인사과장은 2군 사령부에 가서 그것을 빼내겠다고 술과 담배를 사서 보내자고 했다. 정말 기가 막힌 사건이었다. 도대체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아무튼 모두 해주었다. 혼자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괘씸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을 참아보자, 사회도 마찬가지겠지만 사람을 이렇게 이용해도 되는 것인지, 사실을 알고 보니 광주포병학교에서 발령일자를 나에게 하로 늦게 통보한 것이었다. 인간관계 가 이렇게 메말랐는지 생각할수록 괘심했었다. 나는 명일 신고 하기로 하고 일찍 퇴근해서 하숙방을 구했다. 이곳은 성당(聖堂)과 교회가 좌우로 위치하여 꽤 괜찮은 곳으로 느낌이 좋았다. 하숙집이 좀 가난한 집인 모양이었다. 그런데다가 여름철이면 매우 더울 것 같았다. 그러나 나그네가 이것저것 가릴 수 있는 입장도 아니기도 하다.

1967.3.18.(土)흐린 후 맑음:

일곱 시 삼십 분 경 부대에 출근했다. 그리고 사단장에게 부임신고 하려고 했더니 무슨 회의가 있다고 하여 정오 12시 가까이 대기하고 있다가 월요일에 신고 하기로 하고 숙소로 왔다. 나는 점심을 먹고 선배장교 하숙집을 방문했더니 고향가고 안 계신다고 했다. 나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하숙집 옆에 위치한 성당(聖堂)으로 향했다. 언젠가 내가 영원히 믿어 보려고 했던 신앙(信仰) 이었다. 성당(聖堂)에 도착하자마자 신부(神父)님을찾았다. 그리고 대담하게 믿어보기로 했다. 내일 미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군생활에서 이렇게 찬스를 얻기도 힘든 일이었다. 나의 아이디어가 어떻게 방황(彷徨)하던지 간에, 나 혼자 조용히 참회(懺悔)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이유와 결과가 어떻게 되었던 믿어보자는 심정이었다. 오후에는 숙소에서 가만 앉아 명상에 잠겨보았다. 명일이 일요일이지만 안동땅에는 아는 사람도 없으나 어떠하던 견디어 살아가야 하는 몸이니 어디엔들 못 견디겠는가 하고 자문자답을 해본다.

1967.3.19.(日)맑음:

오늘아침 7시에 성당 미사에 참석했다. 그런데 천주교 종교의식은 잘 몰랐다. 그런 대로 교우(交友) 한 분이 친절히 가르쳐 주셨다. 나는 옆 사람의 눈치를 보며 그 의식을 따랐다. 마치고 나올 때 미사 통상문 이란 것을 한 권 샀다. 그래서 평신도 회장 되시는 분에게 여러 가지로 질의응답을 하며 걸어 나왔다. 집에 돌아왔어 늦게 아침식사를 했다. 영어 회화책을 좀 보다가 낮잠이 들었다. 깨어났어 점심을 먹고 오후 3시경 기원(바둑)에 갔어 몇시간 쉬다가 저녁이 되어 식사를 하고 난 다음 다시 성당의 밤 미사에 참석했다. 오늘 아침보다는 좀 덜 어색했다. 저녁에는 몇몇 교우가 친절히 지도해 주었다. 치과의사이신 교우한분은 나를 다방으로 인도하여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마련해주셨다. 그 자리에서 천주교 의식을 많이 들었다. 의식은 꽤 어려운 것 같았다. 그러나 차츰 믿음의 자신감(自信感)을 갖게 되었다.

1967.3.20.(月)맑음:

부대에 출근했다. 아직도 사단장이 오시지 않아서 부임신고를 못했다. 바깥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생각 끝에 고등학교 후배장교를 찾기로 했다. 군인PX(희망 구락부)당구대 탁구대를 구경하며 후배장교와 담소를 나누었다. 후배장교는 나더러 점심을 함께 나눠 먹자고 했다. 나는 사양하다가 결국 같이 먹고는 다시 부관부에 올라갔더니 아직 부임신고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길로 희망구락부에 가서 당구(撞球)도치고 탁구도 치고 하다가 퇴근시간이 가까이 되어 연대장님과 자미 있게 Ping-Pong을 몇 게임 했다. 그 연대장은 자기 연대에 좋은 탁구대가 있다고 놀러 오라고 했다. 또한 정보처(情報處)에 있는 선배장교를 만나서 한참동안 담소하다가 퇴근시간이 다 되어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는 저녁 미사에 참석했다.

1967.3.21.(火)맑음:

사단장에게 신고를 하지 못해서 아직 나는 보직대기 신세다. 오늘은 종일토록 희망구락부 유리로 덮인 베란다에 앉아서 혼자서 명상에 잠기곤했다. 이따금 노래도 부르고 시간을 보냈다. 오후에는 사단장(師團長)이 출근 하셨기에 신고하는가 했더니 당구장에 갔다는 것이다. 역시 신고는 못하고 퇴근하고 말았다. 부임(赴任)시간이 이렇게 길어서야 유사시 군의 기동력이 제대로 갖추어지겠나 하고 염려스럽기도 하다. 세수를 하고 발을 씻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또 성당에 나갔다. 미사에 참석하며 유심히 관찰 해보았다. 흡사 우리 나라 제사(祭祀)지내는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들었다. 시종일관 엄숙했다. 마치고 교리(敎理)시간이 있었다. 교리시간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천주교의 의식설명들이 었다. 그것을 마치고 탁구장에서 김형이란 교우 한사람과 잠깐 동안 탁구를 쳤다. 시간이 저녁12시가 가까웠어 헤어졌다.

1967.3.22.(水)비온 뒤 맑음:

날이 몹시 차가웠다. 오늘은 신고를 마쳐야겠는데 오늘따라 사단장의 생일날 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희망구락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을 먹고 이발도하고 그냥 숙소로 나왔다. 바깥에서 양복점에 가서 양복값을 문의 해보고 돌아왔다. 나는 신부(神父)님이 빌려주신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 박도식 신부님 이 니으신 책을 오늘로 다 읽어보았다. 저녁 먹고 7시30분 미사에 또 참석했다. 날마다 참석하고보니 천주교의식에 익숙해 지고있는 셈이다. 부활절을 기해 그 의식을 모두 보고자 하였다. 9시경 미사를 마치고 나는 숙소로 돌아왔으나 대문이 잠겨 있는 체 모두 잠이 들었는 모양이다. 아무리 두들겨도 열어주지를 않는다. 생각 끝에 이웃집(바로 옆집) 문을 두드리고서 우리 집 문을 열어 달라고 했다. 겨우 열었다. 그리고는 방에서 혼자 깊은 명상에 잠겨보다가 잠이들었다.

1967.3.23.(木)흐림:

오늘아침 세수할려고 대야를 바라보니 얼음이 깡깡 얼어붙어 있었다. 겨울이 아직도계속되는지 정말 심술궂은 날씨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내의를 있는대로 모두 끼어 입었다. 뜨거운 아침을 먹었겠다. 거기에다 뜨거운 물이며 뜨거운 것이라면 무엇이든 마셨고 또 먹어 두었다. 그러고 나니 추위가 덜 했다. 오늘은 겨우 부임신고를 마쳤다. 사단장께서는 간단한 말로 근무를 잘 하라고 했다. 특명은 포병사령부로 참모장이 결정했다. 그런데 인사처에서는 아직 특명이 발부되지 않았으니 인사참모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다. 기다리다 오시지 않아 나는 그대로 퇴근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는 또 미사에 참석했다. 그런데 오늘 저녁은 성체조배(혼자서 하느님과 대화)를 자정까지 해야된다는 것이다. 나는 10시 까지 있다가 나왔다. 의식에 능숙한 참석은 되지 못했지만 나는 깊이 묵상했다.

1967.3.24.(金)맑음:

부대에 출근 했더니 사단 인사참모가 면담하자는 것이다. 나는 신고를 하고 면담에 들어갔다. 먼저 질문이 어디에 근무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나는 어디든 좋다고 했다. 그렇게 답변했더니 일단 포사령부에 가서 있으라는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포병출신 이니까 포병부대에 근무해야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포병사령부에 갔더니 아직 특명이 내려오지 않았었다. 인사과에서 대기 하다가 오후5시가 되어 천천히 걸어가다가 보니 하숙집까지 오고 말았다. 걸으면서 잡다한 생각을 많이 했었다. 희망제대 과연 10월달에 제대를 순조롭게 해줄가? 또 한가지 문제는 2학기등록 때문에 제대일자 가 변수가 되어 더욱 초조하다. 그리고 나는 마음속으로 암송한다.

“전능하신 천주와 평생 동정녀 이신 성모마리아 와 대 천사 성미카엘과 세자 성요안과 사도 성베드로 성바오로 와 모든 성인 성녀께 고백하오니 과연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많은 죄를 지었나이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평생동정녀이신 성마리아와 대천사 미카엘과 세자 성요안과 사도 성베드로 성바오로 와 모든 성인 성녀는 나를 위하여 우리 주 천주께 빌어주소서, 전능하신 천주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죄를 사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이라고 주절 되어 보았다. 내 발걸음은 그런 대로 땅 바닥을 주름 잡아가고 있었다.

나는 진실로 천주교를 믿어 보고싶다. 그러나 현실을 외면한 신자는 되기 싫다. 나는 나의 가정을 생각한다. 나의 형님의 종교관을 생각한다. 또한 형님의 장로교로서 계시를 생각 해본다. 나 역시 개신교 세레도 받았으나 그들 믿음의 야단스러움을 싫어했다. 그리고 불교는 梵我一如(범아일여; 자기를 탐구하다보면 우주의원리와 일치한다.), 治國産業 是亦佛道(치국산업 시역불도; 나라를 다스리고 산업을 장려하는것도 또한 불교의 도라.) 그러한 불교교리의 원리를 나는 무척 좋아 했으나 불교신도들의 샤마니즘적인 것과 접목되어 너무나 비현실적인 것이 많았다. 어차피 인간의 영적인 공허감과 외경(畏敬)을 메꾸기 위해 종교를 선택해야 겠는데 그 가운데 모순이 덜하고 그 모순을 지양(止揚)한 종교관을 갖기로 결심했다. 나의 세대부터 시작하여 자자손손의 혈통은 천주교 교인이 되어줄 것을 심심한 기도를 했다. 세계문명주의에 어깨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우리 나라의 윤리도덕 그리고 동방예의지국, 이 모두는 붕괴되어가고 있다. 이제 다시 뼈대를 세운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천주교의 의식에 내 가정의 윤리관을 접목시킬려고 한다. 그러면서 한국고유의 예의를 고수할려고한다. 이것이 나의 미래 가정생활의 복안이다. 그리고 그 범위내에서 다소의 가정 바깥생활의 융통성(融通性)을 허용하려 한다.

이러고 보니 오늘 나는 당장 어느 어린이의 학부형 같기도 하다. 상상과 보행을 번갈아 가며 집근처 성당 가까이 오고 있었다. 나는 또 생각한다. 아버지를 생각한다/엄마를 생각한다/형님을 생각한다/누님을 생각한다/동생을 생각한다/조카를 생각한다/자형을 생각한다/이모(姨母)를 생각한다/고모(姑母)를 생각한다/외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의 나를 비교한다. 내 나이를 비춰본다. 상상은 물 흐르듯 소리 없이 흘러 내려가고 내 발걸음은 숙소 대문앞에 다다르고 말았다.

1967.3.25.(土)맑음:

화사한 날씨였다. 천천히 부대에 들어갔다. 포사(砲師) 인사과에서는 사단(師團)에서 아직 특명이 하달되지 안 했다고 했다. 나는 고등학교 후배장교 池소위와 함께 인사과 앞을 왔다갔다 거닐면서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탄 터지는 유머를 나누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11시가 넘어도 명령의 소식이 없어 또 집으로 걷기로 했다. 내 몸은 보드라운 봄 햇살에 축 늘어졌고 이따금 지나다니는 자동차는 비포장 도로라서 구름 산 같은 먼지를 뿜기도 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말썽 부리는 대문을 뚜드려 고쳤다. 그런데 申중위란 장교가 나를 찾아와서 자기 집으로 들려달라고 전했다고 한다. 나는 식사를 하고 그곳을 들렸다. 무슨 큰 사건도 아니고 심심하니까 부른 것이었다. 나는 그 친구에게 돈을 좀 빌려서 오는 길에 4월호 時事영어책을 한 권 사서들고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편지 한 장을 부치고 목욕을 갔다. 몸무게를 달아보았더니 60kg 이었다. 장교후보생 교육때보다 5kg 이나 줄었다. 이제 운동도 좀 해야겠고 건강관리를 신경을 써야겠다. 저녁에는 성당 신부님이 주신 책을 읽어 가며, 꽤 흥미롭게 시간을 메워 가고 있었다. 10시에 양초 한 자루를 사들고 성당에 나갔다. 부활절 행사는 엄숙했고 어떻게 생각하면 불교의식이 연상되기도 했다. 신부님은 경문을 외우며 종교의식을 진행했다. 큰 양초에 십자가(十字架)를 긋고 알파와 오메가를 쓰고 올해 년도를 새겼다. 촛불에 불을 붙일 때 신도들도 따라서 했다. 그것은 예수의 부활이 신도들에게도 뜻이 있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의식(儀式)은 시종(始終) 앉았다/ 섰다/무릎을 꿇었다 해서 12시가 되어 영광송(榮光頌)을 부르며 종을 울리고 오르간을 타고 요롱(조그마한 종)이 울렸다. 동시에 덮어둔 십자가와 성모마리아상을 벗겼다. 나는 유심히 바라보았다. 더욱이 성모마리아가 아기예수를 앉고 있는 상(象)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성체 떡(빵)을 신부님이 줄 때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성호(聖號)를 긋고 조용히 먼저 나왔다. 시계는 새벽 1시15분이었다.

1967.3.26.(日)비옴:

오전10시30분에 성당에 나갔다. 미사에 참석하고 집으로 왔다. 점심을 먹고 난 다음 종일토록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 박도식 신부님이 지은 책 제3권을 방구석에 들어 누어 읽어보았다. 이제 누가 천주교에 대해서 묻는다면 평범한 대답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사의 의의도 알았고 종교에 대한 이해를 다소나마 알 것 같았다. 나는 하루 빨리 모든 천주교 의식을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 책들을 서둘러 읽고 싶었다. 그리고 번민에 쌓일 때는 성체조배(천주께 묵상기도)를 하고 싶었다. 나는 몇 가지 의문점을 쪽지에 적어서 신부님께 직접 질문하기로 했다. 저녁에도 성당에 나갔다. 부활절 내내 나갔다. 그리고 숙소에 들어와서는 시사영어를 읽어보았다. 내용들이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다; 케네디 대통령의 죽음/miracle영화의 시나리오/로버트 프루스트의 생활추모 등등 자미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오늘도 해는 어김없이 지고 밤은 어둠의 커튼을 내렸다.

1967.3.27.(月)맑은 후 흐림:

부대 출근하여 상황실에 나가 과장이 지시하는데로 하나하나 챙겨보았다. 포사령부 작전보좌관의 직책은 처음인 셈이다. 그런 대로 무엇이던 닥치는 대로 처리해보았다. 점심때 먹은 것이 소화가 잘 되지 않은 것 같아서 PX에 가서 사이다 한병을 마시고 난 다음 이발을 했다. 오후 근무를 때우고 퇴근 했다. 오늘은 여유시간에 어떤 시상(詩想)이 떠올라서 초안을 잡아보았다. 아직도 수정단계에 있다. 저녁에는 성당의 문을 두드렸다. 신자(교우)들도 뜸하여 혼자인 기분으로 괜찮은 분위기에 잠겨보았다. 요즘의 나의 편견인지 아니면 egoist 인지 습벽이 되어 사람이 없거나 적은 곳을 좋아했다. 미사를 마치고 신부님께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 마지막 4권을 빌려 읽기로 했다. 신부님은 독서를 빨리 한다고 칭찬 이시다. 내가 꽤 관심이 있는 책인가 보다. 저녁에는 교우 한 분과 다방에서 오래도록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고 헤어졌다.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무신경상태(無神經狀態)에서 뚜벅뚜벅 내 숙소로 걸어들어 왔다.

1967.3.28.(火)맑음:

안개가 자욱한 아침이었다. 흐린 듯한 날씨였으나 포근한 느낌이 더하였던 날씨였다. 부대에서는 베트남에 있는 한국군을 방문하고온 한양대학교 교수 강연회가 있었다. 나는 사단 연병장의 제일 뒤편에 자리잡고 경청해보았다. 약 한시간 반 동안 의 강연은 끝나고 우리장교들은 근무처로 돌아가서 도시락을 먹었다. 오후에는 예비병 교육을 확인하러 뒷산에 위치한 훈련장에 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오고 보니 산 위에는 시원했고 파란 잔디 위에서 한참동안 앉아서 쉬었다. 그런데 바로 발 앞에 할미꽃이 겸손히도 고개를 숙이고 있지 않았던가 나는 그 할미꽃을 꺾어 들고 한참 쳐다보았다. 그때 한 장교가 보자고 하며 잽싸게 가져가 버렸다. 오늘 퇴근 때는 결혼한 친구가 자기집으로 초대하며 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는데 그 제안을 거절할 용기가 없었다. 육군중위 봉급을 받고도 참 아름답게 가정을 꾸며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나더러 결혼하면 오히려 돈이 적게든다고 강조하는것이었다. 글쎄 과연 그럴까? 하는 표정으로 넘겨버렸다. 나는 총각이면서도 돈이 황금이 항상 부족했다. 그렇다고 젊음답게 사용해본적도 없었다. 가끔 책을 자주 구입 했다고 하면 과장일가, 나는 이따금 생각하기를 결혼하고 계속 자신의 이상의 꿈을 위해 책에 몰두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부질없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나는 제대하고 또 공부할몸이 아닌가,

그럼 행복은 무엇이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행복과 인생은 standard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표준이 없는 자체가 매력있다는 것이다라고 답변하고 싶었다. 어느 것이 더 큰 행복인지 누가 증명 할 것인가, 기원전 통(桶)속의 디오게네스 철학자가 더 행복 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 당시 장엄(莊嚴)하신 알렉산더대왕이 더 행복했던 것이었는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기도 두분의 대화였었다.

나는 아직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한 일도 없고 가까운 주위의 친구들이 하나같이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여러 생각의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1967.3.29.(水)맑음:

여느 때와도 같이 부대에 출근했다. 도착하자마자 할일이 밀려 있었다. 이상하게도 소속부대 부임특명은 바로 오늘 내려왔는데 S-3 상과 과장은 많은 업무를 나에게 맡겼다. 말하자면 나는 작전장교 보직을 미리 받은 셈이었다. DTP(세부훈련계획)을 작성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 맡아보는 보직이라 좀 황당하기도 하고 맘 내키지 않은 것이었으나 명령대로 해보겠다고 했다. 퇴근후 숙소에서 곰곰이 훑어보니 잘 작성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나는 저녁 10시경 옷을 사복차림으로 갈아입고 선배장교를 찾았다. 그러나 선배는 그곳에 없었다. 나는 다시 돌아왔어 혼자서 연구하며 작성해보았으나 잘 해결되지를 않아 익일 아침에 작성하기로 미뤄 두었다. 한밤중에 그 선배장교가 내 숙소에 들렸기에 문의했으나 그 선배님은 그것은 좀 있다가하고 한잔하러 나가자는 것이다. 내가 거절이나 사양할 틈도 주지 않고 끌리어 나가다시피하고 말았다. 막걸리 한대로 나눠 마시고 얼큰한 가운데 그것을 검토했으나 선배장교님도 잘 모르겠다는 것이 아닌가, 사태는 이쯤 되고 보니 갈수록 태산이 되고 말았다.

1967.3.30.(木)비 님이 옴:

비가 내리는 것이었다. 봄 비 님이 오시는 것이었다. 나는 우의를 입고 출근했다. 부대에 들어가자마자 어제 못다 한 문제의 숙제를 고참장교에게 문의했던 바 너무도 쉽게 잘 가르쳐 주셨다. 나는 그때부터 한시간 이내로 모두 작성해놓고 과장님에게 고향에 약일주일간 휴가를 보내 달라고 했다. 과장께서는 허락해 주셨고 나는 출장증을 가지고 숙소로 나와 옷을 갈아입고는 신부님이 준 책 마지막 4권을 다 읽었기에 가져다 반납 할 겸 몇 일간 미사에 참석 할 수 없기에 천주성부께인사하고 성당에서 혼자서 성체조배를 하고 십자가 와 성모마리아 상 앞에서 나 혼자만의 기도로 조용히 묵상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신부님께 찾아가서 책을 반납했더니 신부님은 또 다른 책“영원한것들“이란 책을 권했다. 나는 대충 내용을 훑어보니 괜찮은 것 같아 빌려가겠다고 했다. 신父님과 좀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간에 쫓기어 숙소에 돌아와 가방을 챙기고 안동역에 나갔다. 출장증은 2등 객차에 타게 되어 있었다. 울산고향에 도착즉시 아버님께 역시 동양풍속으로 큰절을 올리고 누님과 자형께도 인사를 드렸다.

1967.3.31.(金)맑음:

아침부터 울산시내로 나갈려다 중지하고 큰집으로 갔다. 백부님 파제날 이라고 음식을 많이 차려놓았다. 나는 맛있게 배부르게 먹고는 몸이 피곤하여 집에 낮잠을 잤다. 저녁이 다 되어 밥을 먹고는 “권성진“ 친구 집에 찾아가 그곳에서 한참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누님 집에 갔다. 숙모님이 밥을 같이 먹자고 나를 찾았다는 것이다. 아버님께서도 숙모님을 찾아 뵈우라는 것이었다. 마침 누님 댁에 숙모님이 오셨기에 식사를 했다고 말씀드렸더니 내일 조반을 하러 오라고 하셨다. 나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을 드렸다. 집에 와서는 아버님과 바둑을 두었다. 내가 2회나 연달아 졌다. 내 방에 들어 와서는 담배 한 개비를 피우고는 잠을 청했다. 인간은 이 세상 마즈막날 부터는 평소에 꾸는 꿈나라에서 영원히 활동 하겠지!

1967.4.1.(土)맑음:

아침을 먹고는 저 건너 앞 들판을 산책할려고 나섰다. 나가는 길에 “권성진”친구가 같이 산책 하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동심(童心)으로 돌아가 그때 고기잡이하던 곳을 가 보았다. 그 개울은 더 길게 둑이 쌓여져 있었다. 나는 곧 군복을 벗게 되었고 그 친구는 치과(齒科)를 졸업했기에 다가오는 4월3일 군의관 교육을 받으러 간다고 한다. 우리 둘 친구는 죽마고우가 아니라 죽고마우 친구 라고 할까 그런 친구 사이였다. 다만 마을에서는 옛날의 양반행세에 있어서는 우리집이 좀 따지는 집안이었기에 함께노는 것을 내형님들이 제제를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초등 학교 때는 잘 몰랐는데 상급힉교로 올라 갈수록 공부를 잘하여 서울대학교 치과(雉科)에 합격한것이었다. 숨은 노력이 보통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학과 선택을 보면 서로의 취미는 달랐다. 오전 10시경 우리 둘은 울산시내로 나갔다. 우선 신문기자생활 하고 있는 “한종오”친구 부터 만나서 미정(味庭)이란 한식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초원이란 다방에서 coffee 한잔식을 마시고 난후 고등고시 발표에서 자기 이름이 빠진 말하자면 고배를 마신 최병국이란 친구와 위안겸 막걸리 한잔을 하러 갔었다. 그 친구 술이 꽤 센 편이었다. 좀 과장하면 한번 마시면 정신말장한 술통인 셈이였다. 장소를 옮겨가면서 마시다가 헤어졌다. 그리고 우리 둘(권성진과 나)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괴테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 선생이 한 말씀 중 유난히도 외우고 싶었던 외침의 소리 “너희는 손뼉을 쳐라 희극은 끝났다.“ 이것이 무슨 소리였는지 아직 나는 이해 못하고 생각하며 또 생각하며 되새김하고 있다. 어쩌면 이해 될 것도 같고 또 어쩌면 더욱 오리무중(五里霧中)이고 오묘한 여운을 남기는 인생에대한 핵심적인 외침 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1967.4.3.(月)맑음:

7시10분 아침 첫차로 부산누님댁에 울산계시던 어머님이 누님댁에 가 계신 다기에 기차를 타고 달려갔다. 고향 울산덕하에서 이불을 안동 하숙집으로 옮겨야 하기 때문에 어머님이 챙겨 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산 누님 댁에 도착했더니 마도로스 2등 항해사 이신 자형(慈兄)도 휴가차 오셨던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님이 그곳에서 부산 이모님댁으로 얼마 전에 이동했다는 것이었다. 즉시 이모님댁으로 달려가 보았다. 그곳에서 이모/이모부 그리고 어머님도 만나고 닭고기 한 냄비도 받아먹고 다시 어머님과 나는 고향 덕하로 열차로 달렸다. 집에 잡일을 거들어 주다가 이윽고 밤이 되어 온 식구가 둘러앉아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자형(慈兄)과의 대화는 일일이 의견이 일치한 감을 느끼기도 했다.

1967.4.4.(火)맑음:

날은 맑고 보드라운 봄바람이 다소 강한 느낌이었다. 아침에는 자형과 지붕을 고치고 오후 1시에는 막내누님/자형과 나는 진해에 벚꽃 구경을 하기 위해 직행뻐스를 타고 달렸다. 진해는 나로서는 첫걸음이었다. 이윽고 진해 시내에 도착하니 여덟 갈래로 뻗어나간 아담한 로터리에는 분수대에 분수가 한복판에서 넘치는 듯 치솟고 있었다. 그 풍경을 배경으로 자동카메라로 세 사람을 눌러대고 있었다. 다음 벚꽃동산을 찾아 벚꽃을 만끽 해보았으나 그렇게 활짝 피지는 안 했다. 휴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상춘객은 별로 없고 한적한 음식점만 즐비하게 늘려 있었다. 음식점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 음식을 청해 먹었다. 자형과 나는 막걸리를 몇 잔 걸쳤다. 저녁6시반 진해에서 직장을 가지고 있는 돌아가신 형님의 친구인 고향선배 형님을 전화를 걸어 “상록수“ 란 다방에 만나고 또 간단한 식사를 한 후 세 사람은 마산으로 향하는 합승을 타고 마산으로 달렸다. 마산에 도착하고보니 날씨가 몹시 차가운 느낌이었다. 그대로 여관에 들어갔는데 연탄냄새가 차서 자형을 따라 해변에 대기 해놓은 자형이 타고 다니시는 선박“半島號;반도호“ 항해사실에 잠을 자기로 했다. 방은 아담하기도 했고 없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일류호텔이라고 말하면 좀 과장이 될까, 선박 안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나에겐 처음 있는 일이다. 항해사실 두 개중 하나는 나 혼자 자고 또 하나는 누님부부 몫으로 할당받았다. 자형방에서 이야기를 좀 하다가 내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해보았다. 그러나 잠이 잘 오지 않아 선박창문으로 반짝거리는 바다를 바라다보니 마음이 탁 트여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한 참 후 나는 침대에 누어 담배를 한가치 길게 피우고 완전 취침상태로 들어갔다.

1967.4.5.(水)맑음:

맑은 날이 틀림없는데도 꼭 흐린 날씨 같았다. 아침 항해사방에서 세수를 하고 자형방 테블에 식사를 가져오게 하여 room-service로 식사를 한 셈이었다. 간단한 식사이면서도 매우 맛이 있었다. 식사후 마산 시내를 구경나갔다. 진해가 정말 잘 정리되고 깨끗한 도시였고 단 한가지 흠을 잡는다면 시민의 80%가 군인 이라는 것이다. 군생활은 사회인의 생활과 달라서 그렇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다. 그런데 마산도 그런 대로 깨끗하고 짜임도 있었다. 거기서 우리 일행은 “클레오파트라“ 란 영화를 감상했다. 웅장한 것이 전부였던 것 같았다. 시내 식당에서 불고기 백반을 한 그릇씩 해치웠다. 그리고 자형은 명일 그 선박으로 부산으로 오기로 하고 누님과 나는 버스로 부산을 향해 1시간만에 달려왔다.

1967.4.8.(土)비옴:

엊저녁부터 내리는 비가 봄 하늘과 땅을 한없이 서정으로 적시고 있었다. 나는 아침에 토요일 인줄도 모르고 밥하는 꼬마에게 도시락을 달라고 했더니, 오늘이 토요일이라 준비하지 안 했다는 것이 아닌가. 말하자면 반공일인 것을 그때서야 겨우 알아 차렸다는 멍청이 였었다. 나는 우의(雨衣)를 걸치고 가방을 들고 부대에 나갔다. 도착하자마자 매우 바빴다. 교육생집합이니 무어니 무어니 여러 가지로 바쁜 일정(日程)이었다. 그러나 퇴근시간 오후 1시에는 사정없이 퇴근하고 말았다. 밥을 먹고 집으로/친구에게로 각각 편지를 쓰고 보니 약 여덟 장이나 되었다. 밖에 나가서 편지를 붙이고 또 비듬 약을 사고 기원에서 바둑을 몇 판 두었는데 연달아 지고 말았다. 숙소로 돌아와 성당의 저녁 미사에 참석 했다. 나도 모르게 기도를 하다보니 무아경지속에 진실한 기도가 되었던 것 같았다.

1967.4.9.(日)비와 구름 이따금 햇빛:

오늘은 일요일 성당에 나가서 미사에 참석했다. 미사를 마치고 나는 영화구경을 했다. 그리고 좀 늦게 점심을 먹고 전 번에 쓰다 남은 詩를 완성해서 전우신문 편집실에 보냈다. 그리고 시사영어책을 좀 보다가 시간이 되어 저녁 미사 에 참석 했다. 오늘은 “성소절“ 이라 많은 젊은 청년/처녀들이 성당으로 나오게 기도하고 나아가서 각각 신부 와 수녀가 되게 한다고 하는 기도절인 모양이다. 묵상(黙想)의 기도가 많았다. 나는 무릎을 꿇고 했더니 쑤시고 아팠으나 정신일도의 기도로 연상하며 참았더니 덜 아픈 것 같았다. 과연 정신 즉 영혼의 힘은 육체힘을 능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되새김 해 보았다.

1967.4.10.(月)흐린 후 비옴:

비가 올 듯 했지만 나는 비를 맞아도 괜찮은 복장으로 출근했다. 거리에는 모두들 바쁜 걸음으로 제나름의 직장에 나가고 있었다. 나는 덜커덩거리는 부대차를 타고 달리는데 오늘따라 엉덩이가 몹시 베기는 것이었다. 부대에 도착하자마자 교육자를 집합 시키고 또 오늘 보고할 주간 계획표를 작성한다고 열심을 다 기울였다. 전방에 있을 때는 주로 사병을 다루는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면 후방인 여기서는 내 맡은 서류챙기는 업무에 바쁘기 끝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오후에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내리더니 마침내 빗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작전과에 근무하는 사병과 나는 보고서 작성을 완료했다. 나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현재의 나와 공상세계(空想世界)의 나를 생각 해본다. 퇴근시간이 되어 퇴근할려고 하니 병사들이 우의를 가져왔다고 입고 가라고 했다. 나는 그만두라고 거절했으나 그래도 권하기에 입고 퇴근했다.

1967.4.11.(火)흐림:

요즈음 서류에 묻혀서 그런지 과거보다 자신의 공상의 시간이 줄어들었다. 항상 지루한 시간이면 공상시간으로 메우기 마련이었는데 요사이는 정신적으로 좀 향상된 기분이다. 아침 출근 하자마자 교육집합 시키고 중식이 끝나자마자 또 교육집합 그런 대로 재미있기도 하다. 오늘은 동생편지를 받고 보니 더 한층 기분이 좋았다. 육본에서 나의 제대예편이 8월-10월1일 안으로 될 것 같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로서는 너무도 너무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혹시 또 연기가 되면 어쩌나 하고 초조하게 기다려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대애 에서는 그 표정관리를 잘못하면 오해의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진실을 속에 넣고 가면으로 지내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군복무 중에 2학기 등록도 해야하고 전공과목 공부도 게을리 할 수 없는 사정이 있기에 두 마리 토끼를 쫓지 않으면 둘 다 놓치는 꼴이 되고 만다. 나는 이발을 하고 머리에 비듬 약으로 씻기도 하며 끝내고 옷을 벗고 더러 누어 대학시절로 돌아가는 꿈을 꾸며 조용히 잠들어 보았다.

1967.4.12.(水)맑음:

따사로운 날씨였다. 봄 햇살을 쪼이려고 의자를 바깥에 내어놓고 함북 쪼였다. 업무만 바쁘지 않으면 저 태양이 서산에 넘어가 없어 질 때까지 쪼이고 싶었다. 점심도 바깥에서 먹었고 온통 봄 햇살을 즐겨 보았다. 그것도 좋았지만 업무에 집착하는 마음도 싫지는 않았다. 오늘은 정말 영어로 원더풀day 었다. 이 얼마나 가득하고 평화로운 봄날인가 마음 뼈 속까지 가득 찬 봄이었다. 숙소에 와서는 친구에게 편지를 한 장 긁었다. 좀 무거운 소재로 담아보았다. 이것이 젊음의 가장 아름다운 대화임에 틀림없다고 여겨본다. 그렇게 감미로운 말은 없었지만 덤덤하고 담담한 이야기들이었다. 저녁에는 혼자서 가만히 “안개 낀 초원“ 이란 영화를 감상했다. 좀 슬픈 내용이었다. 또 내일의 fine day of Spring을 기대하며 잠들어 보자.

1967.4.13.(木)맑음:

오늘은 내가 무엇을 했더라, 부대에 들어가서 태권도 시범 병사들을 인솔하고 군사령관이 오신다고 위에서부터 병사들까지 호들갑을 떤 하로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러나 사령관 열병식에는 참석하지않은 나는 공간의 시간이 많았다. 작전과 바로 앞에 있는 언덕을 가만 가만 산책도하고 수양버들 나무 가지를 하나씩 꺾어들고 이리저리 휘두르며 포근한 햇살을 등에 짊어지고 고요한 봄의 찬가를 감상했다. 이제 바지락 바지락 솟아나는 푸른 잔디를 주시하며 저 건너편 길모퉁이로 부-릉 소리를 뿜어내며 달려오는 버스를 바라보며 한적한 곳에 앉아 관망해 보기도 했다. 오늘은 좀 늦게 퇴근하여 손발을 씻고 저녁을 먹은 후 파자마차림으로 방 바로 앞마당을 왔다갔다하다 하늘을 쳐다보니 초생달 곁에 이쁘게도 빤짝거리는 별 하나가 초저녁 밤하늘을 수채화 그림처럼 그려가고 있었다.

1967.4.14.(金)맑음:

안개가 자욱한 아침이었다. 오늘도 날씨가 좋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부대 업무는 한가 했다. 100m 달리기도 하고 이것저것 다 해보았다. 그런데도 공간의 시간이 많았다. 그렇다고 사무실 안에서 근무시간에 사적인 책을 꺼내어 보려니 과장님의 눈치가 보이고 군대에서 발간되는 육군잡지를 읽어보아도 좀 무미건조 하고 지루해 하던 중 친구에게서 편지가 한 장 날라 왔다는 것이다. 반갑게 펼쳐보니 모든 느낌 하나 하나가 공감 투성이 이었다. 기분은 좋았다. 퇴근했더니 숙소에서도 편지 한장이 와 있었다. 전부대 나의 전령(당번)이었다. 성격 그대로 착함이 소록소록 스며들어 있었다. 저녁 식사후 사복을 입고 성당에 갔어 교리시간에 참석했다. 그리고 매일미사 경본 한 권을 구입했다. 나는 항상책을 구입할때면 무슨 책이던 간에 별 총기도 없으면서 그저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무튼 부족한 대뇌를 메꾸기 위해 기분은 좋은 편이다.

1967.4.15.(土)흐림:

오늘 부대에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담배만 태우며 막연히 서류를 뒤적거리다가 시간이되어 퇴근차가 다 나가고 없기에 곧장 걸어서 숙소에 도착했다. 손발을 씻은 후 곧장 잠들고 싶었다. 조금 있으니 이제까지 나 혼자 독방에 있었는데 다른 분 한 분이 왔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한방에(room-mate)있기로 했다. 나는 마음도 맞고 허물없이 지내려고 후배(고등학교)장교를 오라고 했더니 그는 도리어 나를 자기 하숙집으로 오라고 했다. 내 마음 그곳으로 가고싶었지만 한번 정착한곳을 떠날려니 마음의 변화가 매우 힘들었다. 그래도 그곳으로 가야만 하겠다는 것이 지금의 내 마음이다. 저녁을 먹고 이제 오신 분과 이야기도 좀 해보았다. 그렇게 마음은 맞지 않을 것 같고 그런 대로 지내야 하는 것이 하숙방 인생이 아닌가, 나그네가 무엇을 가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닐 것 같다.

1967.4.18.(火)맑은 후 흐림:

부대출근하자 교육시간 교관 배치를 완료하고 틈을 이용하여 책한 권을 들고 막사주위를 왔다갔다 거닐고 있으니 정보 과장이 양어장(養魚場)에 물 푸는 구경을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가 보았다. 큼직한 붕어가 많았다. 붕어를 잡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곳에 새로운 물을 공급하여 낳은 알을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 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바위틈과 풀잎사이에 알이 무수히 많았다. 떨어진 풀잎을 주어보니 알이 많이 박혀 있다고 양어장 관리장교는 조심 스레이 그풀잎을 쥐어 올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알에서 새끼가 되는 기간은 5일이 가장 이상인 기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물의 온도는 섭씨 18도에서 20도 사이라고 한다. 바위에 붙은 알에 맑은 물을 뿌린다. 이것 역시 사랑이었다. 그것은 정성이요 곧 자신의 사랑심 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흐뭇하게 여기며 관심어린 질문을 많이 한 셈이었다.

한밤중에 실존주의철학(實存主義哲學)을 내 나름대로 정리해보고 싶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 “뿌리깊은 남간 바람에 아니 밀쎄 꼿조코 여름하 나니”라고 했듯이 나는 대학 일학년때 철학과 문학으로 짧은 시간내에 내 인생의 뿌리를 튼튼하게 쌓아놓고 그런 다음 더 많은 시간을. 내 전공학문과 현실생활에 전력을 집중할려고 했었다.

세기전과 중세기의 관념론을 거처 19세기초의 영국의 경험론과 북유럽의 실존주의를 거처 19세기 말의 미국의 새로운 개척정신 죤듀이의 프래그마티즘 실용주의가 탄생한 셈이다. 근세기초의 한국 다산 정약용의 실사구시에도 가깝다.

오늘날 현대철학은 세기전 의 “탈레스,쏘크라테스, 플라톤” 의 관념론을 거쳐 독일 “헤겔”의 관념론과 영국“베이콘”의 경험론을 거쳐 미국“죤듀이” 의 프래그마티즘에 이르고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키케르케골”을 실존주의 창시자로 하여 야스퍼스/하이데카 등등의 실존주의 철학자와 실존주의 문학가“싸르트르”/“가뮤“에 이르기까지 실존주의 가 널리 파급 되어온 셈이다.

이 실존주의가 대두된 것도 19-20세기사이 神이 우리인간을 외면했다고 해서 시작 되었고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은 아무리해도 인간의 정신적면의 힘이 부족한데 대해서 시작 되었던것 같다. 이 實存의 실은 誠實과 眞實과 現實의 복합성을 의미 하는것 같다. “아놀드 토인비”역사 철학자가 지적했듯이 오늘날의 인류의 적이 바로 인류 라는 결론이 나왔기에 더욱 그 실존의 부르짖음이 거세고 또한 두럽기도하여 유신론자들은 실존을 신(하느님)과함께 하고저 했을것 같다.

그 철학자들의 철학적인 개념의 이야기를 읽어보자;

1. 아리스토 텔레스는: 인생은 목적과 수단(手段)의 체계(體系)다.

2. 야스퍼스(實存主義 哲學家;실존주의 철학가):

현대는 여론과 광고의 시대요, 현대의 대중사회는 개성 보다는 평등을, 질대신에 양을, 인격 대신에 기능을 내 세우는 사회며, 이러한 사회 일수록 위대한 인물은 유능한 인물의 배후로 사라지고, 재치있고 아첨과 추종에 능한자가 귀여움을 받고, 물질적 성공주의자가 활개를 치는 사회이다. 인간은 실존으로서의 단독자로서의 인격으로서의 깊이 와 보람과 품위를 상실하고, 실존없는 현존으로 전락하고 만다. 인간은 혼없는 기계인이 되고 인격을 상실한 전문인이 된다.

3. 샤르트르는(實存主義 文學家):

너는 자유다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발명하라 그리고 자기의 존재의 선택을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 그렇다고 실존주의(實存主義)가 개인주의(個人主義)나/주관주의(主觀主義)는 아니다. 타자의 존재는 나의 실존의 조건이다. 타자는 나의 실존에 없지 못할 조건이다. 타인은 내가 생각하는 자(者)인것 같이 그도 생각하는 자요, 내가 뭘 요구하는 것처럼 그도 요구하고, 내가 자유인것처럼 그도 자유다. 타자의 존재는 나의 실존의 조건 곧 인간조건이다. 실존주의적 휴매니즘은 실존의 자유위에서는 행동적 휴매니즘 이다. 유물론은 결국 실증주의를 가장한 하나의 형이상학(形而上學)이고 변증법(辨證法)은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4. 까뮤(실존주의 문학가):

1)“만일 누가 정의의 규범을 이 세상에 적용시키고 천주를 이 정의의 재판에 상정 한다면 많은 사람이 천주를 처단할 것이다. (그는)이렇게 만들어진 세상을 자신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할때 반항밖에 다른 대답이 없었든 것이다.”

2)옥스포드 졸업식장에서 “인생 이란 연습할 시간도 갖지 못한체 자기가 맡은 역을 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Drama(극)입니다.“

5. 슈바이츠 박사(종교신학자/의학박사)의 현실관:

현실에 대한 내인식은 비관주의자이나 의지와 희망은 낙천주의자다.

6. 하이데카(實存主義 哲學家;실존주의 철학자):

죽음의 무앞에 단행되는 결단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세계를 전개한다.

7. 실존(實存):

거짓된 자기가 아니고 진실된 자아요, 비본래적인 자기가 아니고 본래적인 자기다. 실존은 현실적 개념이면서 그것을 넘어서 규범적개념(規範的槪念)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적인 나가 아니요, 있어야할 이상적인 나다. 인간은 무엇이냐 보다 무엇이어야 하느냐에 더 Accent를 두는것이 실존철학(實存哲學)의 인간파악이다. 그러므로 실존은 Sein(存在;존재)적인 인간요소 보다는 Sollen(當爲;당위)적인 인간의 측면이 강하다. 실존철학은 당위적(當爲的)인 이상적 인간상과 가치관(價値觀)을 제시(提示) 하려고 한다.

8. 키엘게르케골(實存主義 哲學家;실존주의 철학가)의:

신앙적 유실론적인 실존도 있고 샤르트르 처럼 무신론적인 실존도 있다. 공통적인 것은 (1)개별적인 주체성 (2)결단적 자유의 존재다. 또한 자유에 대한 분명한 책임을 짊어진다. 즉 본래적(本來的) 자기를 선택하는 주체적 결단을 갖는것이다. 현실/진실/성실의 실존주의(理性Logos와 感性Pathos)는 현실을 타개(打開)하고 현실을 변혁하고 현실을 초극(超克)하려는 哲學이다.

9. 영국의 경험 철학자 Bacon 은 지식 이란 정의를:

개미처럼 수집만 해서도 안되고(經驗派), 거미처럼 이론만 뽑아내어서도 안되고(理論派), 수집(蒐集)과 동시에 창조하는 꿀벌을 배워야한다. 지식(知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지식(知識)은 사람에게 힘을 주기 위한 수단이요, 수단 가운데 서도 가장 효과 있는 확실한 수단이다.

10. 야스퍼스의 철학의 정의: 개체(個體)의 초월(超越)에로의 노력(努力) 이다.

11. 존듀이의 프래그마티즘: 경험과 사실에 바탕을 두고 집념으로 이성과 이상의 개척정신을 도입한 셈인것 같다.

12. 학문: Nature can not be commended except by being obliged.

나의 자작 詩의 한편: “시간과 봄“

무한의 시간이 오고 간다. 인간은 봄을 기다린다.

냇가 그리고 마른 도로변의 버들가지에도 움이 튼다.

하얀 머리카락에도 영적인 아지랑이를 피운다.

나무 가지에 돋아나는 움은 파란 넙적 잎으로 변한다.

그러나 인간의 움은 성과패가 반반 이라고 할까

이유는 생각하는 생명체였다

정녕 인간의 봄은 의지가 필요했고 인내가 필요했다.

무한의 시간은 흐르고 또 봄은 왔다.

1967.4.19.(水)비옴:

비가 줄줄 내리고 있다. 수많은 낭만(浪漫)과 슬픔을 같이 하는 빗 님이 오늘따라 낭만만 가지고 내리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출근 하자마자 우천 시의 교육으로 변경시켜야 하기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고위층 에서는 이중 삼중 지시가 내려오고 해서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런 대로 잘 조정되어 나갔다. 지시(指示)를 내려보낸 후에 시간의 여유(餘裕)가 생겨 한 사병이 보고있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이것이 한국이다.“ 이어령 교수의 작품을 읽어보았다. 내용이 특이 하였다. 우리가 생각지 못한 개념을 뛰어 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호기심이 가는 책이었다. 결국 나는 집에까지 빌려오고 말았다. 숙소에 왔어 저녁을 먹고 난 후 한방친구(room-mate)가 침식가정교사로 나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拍手치며 구태여 말리지 않았다. 그런 다음 후배 하숙집으로 갔다. 그곳에 폭소를 즐길 수 있는 모처럼의 시간을 가져 보았다. 저녁 10시경에 숙소로 돌아왔다. 와서보니 한방의 동료는 가고 쪽지에 글을 몇 자 남겨놓고 떠나버린 것 같았다. 나 혼자 있는 것이 섭섭한 것 같지만 오히려 나로서는 기쁜 것 같다.

1967.4.20.(木)맑음:

맑은 날씨인데도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오늘이 사단창설일 이라 기념체육대회가 있는데 어제 비가 온 관계로 하로 연기되어 내일 기념행사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교육 스케줄을 전면 변경시켜야 하는데 그것이 나의 몫이었다. 간단한 것이 아니어서 좀 혼난 셈이었다. 포사령부에서는 내일 체육대회를 대비하여 응원연습을 하겠다고 교육을 좀 일찍이 마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사령관님의 허락을 얻어 교육시간 2시간을 취소하고 연병장에 집합 하게끔 지시했다. 그리고는 오후에는 시간을 메꾸다가 천천히 퇴근했다. 숙소에 와서는 내가 가방 속에 넣어온 벚꽃 가지를 주인 아주머니에게 주었다. 그랬더니 나에게 이 나이에 무슨 벚꽃이 필요하냐고 별로 달갑지 않게 받아주었다. 나는 저녁을 먹고 성당 교리시간에 참석할려고 했는데 오늘이 금요일이 아닌데 착각한 것이었다. 그리도 막연히 시내를 한바퀴 돌고 왔다. 다소 정신없이 지내는 생활이다.

1967.4.21.(金)맑음:

오늘은 사단창설 12주년 기념체육대회가 열렸다. 가장행열 이며 수많은 민간인들까지 참석해 주었다. 나는 태권도 선수를 집합시켜 출장대기 시키고 스케줄에 맞는 준비를 하느라고 바빴다. 그래도 자미 있는 경기는 배구시합 이었다. 우리 포사팀이 아슬아슬하게 이겼기 때문에 구경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땀을 쥐게 했다. 그런 후에 나는 본부석에 가만 앉아 있었다. 체육대회 종합성적 순위는 병사들 인원비례로 보아서 포병사령부 소속이 적은데도 2위를 차지했기에 모두가 기뻐했다. 나는 가방을 들고 일찍 퇴근하려고 걸어 나오는데 포사령관님이 막걸리 한 잔씩 하자고 제안 하셨다. 나는 일찍 나가야할 일이 있다고 대답하니 무슨 일인데 하고 질문하시기에 성당에 가야한다고 대답하니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이시며 할 수 없지 하는 응답이었다. 그 길로 걸어 나오다가 중간지점에서 합승을 타고 숙소로 나왔다. 그런데 또 부득이한 일이 생겼다. 오늘저녁 베트남 가는 친구가 있어서 모두 케이크 점에 모여 파티를 연다고 한다. 저녁 먹고 나가서 파티에 참석하고 그리고 당구 한 게임을 하고 송별회를 마쳤다.

1967.4.22.(土)맑음:

토요일인데도 예비병교육 때문에 온종일 근무해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당직근무를 하라고 명령이 내렸다. 당직근무는 해주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그기에 한술 더 떠서 상과 선임하사는 휴가를 보내 달라고 하니 이유야 어떻게 되었던 일단 보내 주었다. 어제까지 나는 기념행사 참가하는 운동선수 활동을 도와주는 담당으로 골머리를 때렸는데 오늘은 또 다른 고민을 안겨준 셈이었다. 완전 그로기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어디에 호소 할 데도 없다. 다음주 월요일에는 상과내의 병사들에게 군기확립 차원에서 자체교육을 좀 시킬까 하고 있다. 저녁에는 간단한 점호를 취하고 난 다음 막걸리 두어 잔하며 잠시나마 분노를 가라앉히고 싶었다. 그리고 내무반에 앉아서 책이나 뒤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술기가 남았는지 순간은 평안했고 망각의 나를 감지하며 걱정도 사라진 것 같았다. 그리고는 내무반 인원을 점검하고 저녁11시경 잠자리에 들어갔다.

1967.4.23.(日)맑음:

아침에는 기분이 왠지 상쾌한 것 같았다. 새벽에 청소를 시키고는 종일토록 휴식을 취하게 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잠깐 성당 미사에 참석하고 왔다. 오늘은 어쩐지 몸이 노곤하여 힘이 쫙- 빠진 것 같았다. 천천히 따가운 봄의 태양을 등에 지고 부대로 걸어 들어 온 것이다. 그런데 오후에는 술을 마시고 들어온 병사들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서로 싸우고 때리고 하는 바람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더욱이 예비병들은 사회인과 군인이란 중간 입장에서 대접해야 하기에 다스리기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저녁 즈음에 예비병 한사람이 자기 직장 일로 잠깐 전화 걸고 오겠다고 하기에 나는 내 자의로 결정할수없어 주번사령에게 건의 했더니 “no"라는 답변이다. 반복 건의 했더니 그때서야 "ok" 했다. 그런데 저녁 9시에 온다고 한 사람이 약속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새벽 3시경에 들어왔는데 몹시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저녁 12시가 가까이 되어 내 머리맡에 라디오를 틀어놓고 조용히 흘러나오는 가락을 감상하며 잠이 들고 말았다.

1967.4.24.(月)맑음:

무르익어 가는 봄이다. 나는 아침부터 실탄사격이니 교육생 집합이니 사단회의 참석이니 하며 매우 바빴다. 동분서주 하다보니 몸이 피로가 겹쳐 기진 맥진이다. 그리고 오후 퇴근시간 직전에 포사령부 참모회의에 참석하다 보니 시간에 쫓기어 지칠 대로 지친 셈이었다. 저녁에는 주번근무를 맡아했다. 이쯤 되고 보니 내 육체도 홍길동이에 밑지지 않다고 여겨진다. “洪吉童;홍길동“이 도 이러한 나를 보았다면 아마 놀랬을 거다. 한밤중에는 침구에 기대어 창밖에 밝아오는 달을 보고 지난날 전방 휴전선관측소에 근무하던 때가 상기되어 몹시 그리워지기도 했다. 그 당시의 저 달은 어느 누구보다도 나를 반가이 맞이해 주시었다. 콧노래로 나는 슈벨트의 세레나데를 불러보다가 잠깐 회상과 명상에서 헤매다가 때마침 전기불 이 다시 들어오기에 책을 보다가 담배를 한 대 꾸지 고는 잠자리에 들어갔다. 오늘 하루의 일은 보람있는 일로써, 오랜만에 떳떳하게 천주님께 아뢰고자 한다.

1967.4.25.(火) 또 맑음:

오늘은 지긋지긋한 당직주번이 끝이 났다. 마음이 홀가분하다. 이제 숙소에가서 푹 쉴 수 있겠지 빨리 퇴근하고 싶다. 그리고 내일은 과장님이 휴가를 마치고 귀대 하기 때문에 New-idea로 한가지 해놓아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숙소에는 빨리 오고 싶었지만 그것을 완료하고 천천히 나왔다. 숙소에 들어와서는 손발을 씻고 담배를 한가치 태우면서 그 동안의 피로를 풀어보았다. 그리고는 파자마바람으로 앞마당을 왔다갔다하면서 머리 속까지 복잡한 사항들을 풀려고 했다. 저녁을 먹고는 마루에 걸터앉아 혼자서 가곡도 부르고 성가도 부르고 하며 시간을 보냈다. 천주님 말씀대로 과연 생각과 말과 행위가 사랑의 하루로 메꾸었는지 생각을 해본다. 인간은 사랑을 하기 위해 산다. 그 사랑의뜻은 너무 광범하여 분류하기가 어려웠다. 오늘도 나는 업무에 집착하다가 예하 대대에서 말을 잘 듣지 않기에 화를 많이 내기도 했다. 내 성격 자체가 가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잘 처리못할때가 있다. 이러한 점은 우리집 형제들의 공통사항 이기도 하다. 좋치않은 전통 이라고 깊이 느끼고 있다.

1967.4.26.(水)또 맑음:

무언가도 모르게 오늘은 기분이 좋았다. 웬 일 일까 어제 정성드려 해놓은 환경미화 작업이 새롭게 보고 싶었다. 아침엔 과장님도 오시고 그 동안 처리해온 일을 간단히 브리핑도 해보았다. 오늘은 내가 뚜렷한 이유도 없이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 가만 앉아 있으면 웃음이 저절로 나오고 매사가 자미가 있었다. 어쩌면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몇 일 후에 各 대대 대항 사병들의 웅변대회가 있다 기에 나도 짧은 실력으로 지도하기도 했다. 즐거운 날이며 내 마음 쾌청한 날이었다. 매사가 기뻐만 보였다. 저녁 먹고 목욕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더워서 방문을 열어 재치고 마루에 앉으며 담배를 한 대 물고는 시원한 바람을 쏘이니 솔솔 스쳐 가는 감미로운 향기가 그 바람결에 향수를 뿌리듯 즐겁게만 느껴지네, 아! - 이 엄청난 기쁨의 날이여, 내내 내 곁에 머무를 수 없을까.

1967.4.27.(木)비가 옴:

비가 내렸다. 오래간만에 내리는 비 님이다. 나는 늦을까봐 서둘러 나갔다. 그래도 통근차는 있었다. 봄의 비는 아무래도 여느 철의 비와 틀리는 느낌이다. 부대에서는 웅변대회 때문에 준비에 야단들이었다. 나는 나대로 바쁘기도 했다. 내일은 신체검사 하기 위해 대구에 가야되는데 과장이 내일 가기로 하고 나는 모레 토요일날 가기로 했다. 오후에는 사령관님의 지시로 안동시청에 가서 전국 인구비율 현황을 조사차 들렸더니 안동시에 관한 것 뿐이고 전국의현황은 없어 허탕치고 말았다. 저녁에는 사단장 전속부관인 鄭소위가 제대한다고 자기 하숙집에서 간단한 자리가 마련되어 저녁11시까지 놀다가 돌아왔다. 피곤한 몸이기에 그대로 잠자리에 누울까 하다가 책이 보고싶어 불을 끄려고 하니 네온사인이 고장이라 이 일기장도 익일 아침에 쓰고 있다.

1967.4.28.(金)흐림:

자욱한 안개 낀 아침이었다. 오늘도 나는 나의 업무에 성실을 다했음을 천주께 거짓없이 말씀드리고 싶다. 부대에서 좀 늦게 퇴근하고 저녁을 먹고는 성당에 나갔다. 가만히 성체조배를 드리고는 교리시간에 참석했다. 메시아는 히브리말이고 그리스도는 희랍으로 王 이라는 뜻이란 것이다. 기름이 뻔쩍거리는 머리라는 뜻이었다. 성체조배에는 묵상의 기도로 내일의 나의 여행을 의의있게 해줄 것을 빌었다. 봄은 한창진행되고 있었고 꽃은 만발하고 걷는 내 발걸음을 잠시잠시 멈추게 했다. 한없는 서정에 잠기고 한없는 추억에 잠기고 한없는 희망에 잠기는 기분좋은 날들이다. 이 또한 기쁨의 날이기도 했다.

1967.4.29.(土)맑음:

새벽에 기차로 대구 군의학교에 신체검사를 하러갔다. 신체검사가 끝나고 군의학교 후보생중대에 있는 고향소꿉장난 친구들(정태홍/권성진)를 면회했다. 나는 오후 5시30분 하이마트 음악실에 기다리겠다고 하고 거기서 만나자고 하였다. 점심 식사한후 “miracle/기적(奇蹟)“이란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내용이 꽤 흥미로운 것이었다. 감상하기전에 영화대사(시나리오)를 지난달 시사영어책에서 내 나름대로 열심히 그 시나리오를 영어원문 그대로 외워서 감상했어나 그래도 hearing은 어려운 것이 었다. 마치고 책방에가서 시사영어 5월호 사서들고 음악실에 나갔다. 친구들을 만나서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막걸리 한잔씩을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는 ”안동행“ 기차를 타려고 하던중 또 한 친구를 만나 다방에서 milk 한잔씩 마시고 간단히 주절대다가 굿바이하고 마침내 기차를 탔다. 이제 꽃 만발한 4월도 다 가고 5월이 온다네, 좀 더 푸르고 심오하고 어둑한 계절이 온다네. 어느 계절보다 강한 의지의 계절 이기도 하다. 힘찬 희망의 계절 그 5월을 기다리며 마음의 꿈을 꾸고싶다. 시계는 12시를 맞추고 있다.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1967.4.30.(日)흐린 후 비옴:

날씨가 흐렸다 개었다 비가 오다가 오락가락 반복이다. 아침엔 성당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보트 놀이를 갈까 했더니 갑자기 변화하는 날씨 때문에 그만두고 몇 게임 탁구를 쳤다. 다시 날씨가 깜짝 할 사이에 무더워 졌어 땀이 철철 흘러 내렸다. 집에 돌아올 즈음에 소나기가 계속 내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비를 피해 달린다고 열심히 뛰었으나 옷은 끝끝내 다 젖고 말았다. 그러나 즐거웠다. 돌아오는 목요일은 Christ 승천일이라는 것이다. 오늘은 부하 병사들에게 빌려온 책을 다 읽었다. 내일 돌려줘야지, 4월의 꽃은 지고 녹음짙은 밝은 녹색의 5월이 기어코 오고 있다. 나는 뚜렷한 계획은 없지만 가슴이 벅차다. 오후에는 부대 장교들이 놀러 오고 했어 정신없이 시간을 보낸 셈이다. 항상 웃음 속에 기뻐하며 내일을 기다리자 언제나 이렇게 즐거웠노라고 대답할수 있게끔 노력해보자.

1967.5.1.(月)맑음:

역시 맑은 날이 왔구나, 에메랄드의 향수를 뿌려주는 5월의 첫날이다. 날은 맑고 사람의 마음은 더 용기찬 것 같다. 부대에서는 예비병 제4단계 교육작성 때문에 쉴 사이가 없었다. 이렇게 좋은 하늘 이렇게 맑은 대자연 이렇게 희망에 넘치는 날에 나는 순간순간 미래를 염려하다보면 우울한 생각도 끼어 들기도 하는 것 같다. 가만히 산책도 해보고 몰래 나비가 앉듯이 앉아도 보았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詩를 암송도 해본다.

(1).“시간도 멈춰버린 깊은 산 속에 누군가 큰 나무를 찍고 있다. 마침내 나무는 한쪽으로 스러지고 한줄기 수직의 공간만이 기둥처럼 허공에 떨고 있다. 찾아 보라 찾아보라 집 잃은 새들아 너희들 보금자리 있던 곳을 더 높이 솟아있는 저 속에 아직도 그 여운이 남아 있을 때.“

(2).“바닷가 모래밭에 수도 많은 둥근 차돌 주어 보면 다른 돌만 못해 보여 다시 찾다 해가 져요.“

저녁에는 방에 전기불도 고장나고 하여 파자마차림으로 산책을 해 보았다. 보드라운 바람은 나의 호흡기를 즐겁게 해주었고 밤하늘의 별들은 사랑의 색깔로 가득 차 있었다.

1967.5.2.(火)맑음:

새벽 5시쯤 일어나서 문을열고 밖을 바라다보니 까치/제비/참새등 각종 새들이 5月의 아침을 노래하고 있지 않는가, 나는 마루에 한참동안 앉아 있다가 앞마당을 왔다 갔다 했다. 부대 출근할때는 하복을 갈아입고 출근했다. 교육계획 작성이 겨우 오늘 오전이 되었어야 완료 되었다. 나보다도 교육계 병사들이 더 수고를 했다. 사단작전처(師團作戰處) 에서는 각종의 업무독촉 지시를 내리고 야단이었다. 과장대신 내가 불리어갔다. 이유는 제대병인솔을 하사관이 했다고 작전참모께서 작은 소리로 다정하게 일러주시는 것이 아닌가! 예상을 빗나가는 일종의 훈계였다. 정말 감사했다. 오후에는 기관병 교육훈련 모임 주선. 바쁜 스케줄이었으나 보람찬 날이기도 하였다.

“아! 아름다운 5월의 하늘이여, 은은히 들리는 메아리여, 행복스러운 너의 얼굴이여, 너는 또 무엇을 나에게 가져다 줄 것인가.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면 다른 것 보다 그것을 우선 나에게 보내주렴, 아마도 너는 계절의 여왕이 틀림없는 가보다.“

1967.5.7.(日)맑음:

맑은 5월의 아침이었다. 오전엔 성당엘 나갔다. 미사(missa) 마치고 숙소에 와서 점심 식사후 방안에서 슈바이츠박사님의 인물데생화 를 큼지막하게 그렸다. 그 큰 그림을 벽에 걸어 보았다. 저녁에는 이웃집 어린 꼬마 아기들과 산책하러 나갔다. 바람도 선선하고 밤하늘의 별들은 초롱초롱 맑음을 뽐내며 빤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방안에 들어와서는 무엇인가 심오한 생각에 잠겨있는 박사님의 모습을 쳐다보며 내 손으로 그분이 고뇌하고 번뇌하는 세계를 그려보고 싶었던 것이었고 내 마음을 조용하고 엄숙하게 정리하며 나는 무엇을 위하여 고뇌와 번뇌에 빠져볼가 를 생각해보았다.

내일은 어머님의 생신일 인데 그 은혜는 정말 갚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은 돈으로는 불가능 하다. 아버지 보다 어머님이 더 고생한 것은 자명한 이야기다. 더욱이 한국의 어머니들은 더 고생을 하셨다. 그것은 유교의 남존여비 사상에서 유래 되었을가, 그렇다고 여존남비(女存男卑)라는 결론이 나오면 그것은 서양사상의 왜곡(歪曲)일 것이다. 과거의 한국 어머니들은 남편으로부터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랑부족을 자식을 향하여 희생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베풀어 오셨던 것이었다. 모든 이 세상의 사랑은 그러한 희생적인 사랑이어야 할가?, 의문은 남는다. 현대 주부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시(媤)어머니를 다소 외면하고 있는 것이 아닐가?

고려시대의 여류작가가 쓴 “思母曲;사모곡“은 어머님을 아버님 보다 더 깊은 사랑을 느낀 이유가 그 절대적이고 희생적인 심오한 사랑의 차이 일가?

" 호메도 날이언 마라는 낮같이 덜리도 없어니이다.

아바님도 어이어신 마라는 어머님 같이 괴시리 없어라.

위 덩더둥셔 어머님 같이 괴시리 없어라.

아소님아 어머님 같이 괴시리 없어라.“

“인생 이것은 어떤 의미에선 인간이 사랑의 참을 알기 위해 과학/철학/경제학 등등 어떤학문이던 가네 그것을 찾기 위해 때로는 고통과 번민과 그리고 생명의 희생까지도 가져오는 것이 아닐 가 생각된다.“

추이: 나의 군생활일기기록 기간동안 읽기와 암송을 즐겨했던 영시(英詩)및 영화대사들을 아래에 그대로 옮겨 본다.

1. 미국의 자연주의 작가 Robert frost :

그가 항상 강조하는 말은

“Courage is the human virtue that counts most."

1) <The road not taken>: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s,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lay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Yet knowing how way leads on to way,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_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2)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

"Whose woods these are I think I know.

His house is in the village though;

He will not see me stopping here

To watch his woods fill up with wnow.

My little horse must think it queer

To stop without a farmhouse near

Between the woods and frozen lake

The darkest evening of the year.

He gives his harness bells a sake

To ask if there is some mistake.

The only other sound's the sweep

Of easy wind and downy flake.

The woods are lovely, dark and deep.

But I have promises to k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2. 英國의 自然主義 作家 William wordsworth:

<My heart leaps up>/<내 가슴은 설레 입니다>: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So is it now I am a man;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Or let me die!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내 가슴은 설레 입니다>:

하늘에 무지게를 바라 볼때면

나의 가슴은 언제나 설 레입니다.

나의 삶이 시작한 그때도 그러하였고,

어른이 된 지금 또한 그러하옵니다.

나 또한 늙어질때도 그러할지니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을 것입니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이니,

내가 바라건데 나의 삶의 하루하루가

自然의 경건(敬虔)으로 엮어 지리이다.

3. Julius Caesar of the Laurel Shakespeare;

(기원전 로-마 광장에서의 부르트스의 연설을 기록한 섹스피어의 상상력이 놀라왔고 Brutus 의 그 당당한 모습이 멋있게 상상이 되어 이 대목만을 자주 읽어 왔었다.):

<Brutus 의 변명>;

“Be patient till the last.

Roman, countrymen, and lovers, hear me for my cause, and be silent, that you may hear. Believe me for mine honour, and have respect to mine honour, that you may believe Censure me in your wisdom, and awake your senses, that you may the better judge. If there be any in this assembly, any dear friend of Caesar's, to him I say, that Brutus' love to Caesar was no less than his. If then, that friend demand, why Brutus rose against Caesar, this is my answer___ not that I loved Caesar less; but that I loved Rome more. Had you rather Caesar were living, and die all slaves, than that Caesar were dead, to live all free men? As Caesar loved me, I weep for him; as he was fortunate, I rejoice at it; as he was vailiant, I honour him: but as he was ambitious, I slew him. There is tears, for his love; joy, for his fortune; honour, for his valour; and death, for his ambition. Who is here so base, that would be a bondman? If any, speak, for him have I offended. Who is here so rude, that would not be a Roman? If any, speak, for him have I offended, Who is here so vile, that will not love his country? If any, speak, for him have I offended. I pause for a reply."

4. 헬렌켈라 先生이 헬렌켈라의 손바닥에 적어준 작별의 글씨(고교시절 영어책 에서 발췌 언제나 암기해 왔었다):

“The best and most beautiful thing in the world can not be seen or even touched but just felt in the heart."

5. Miracle(奇蹟) 영화의 대사에서 여주인공 Teresa 역 의 Carol Baker의 인상 깊은 기도 를 잊을 수가 없어 옮겨 보았다.

“Oh, Dear Lord. I Beseech you shield Michael in battle. So he'll return safely. not to me, not to me. . . . But to his own people. where, wist your blessing. . . . he can live out his life in peace and happiness. Oh, God, . . . help me! Help me to atone. And in Your mercy forgive me. Hail Mary, full of grace, the Lord is with thee . . .

(오, 천주님이시여, 간원컨대 천주께선 전쟁터에 나간 마이클 을 보호하사 그이가 무사이 돌아오게 해주옵소서. 저한테 돌려보내진 맙소서. 저한테가 아니라 자기국민들한테 돌아가 천주의 은총아래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수있게 해주옵소서. 오, 주여. . .저를 도와 주옵소서! 저를 보상해주옵소서. 그리고 당신의 자비하심으로 저를 사(謝)하옵소서. 성총(聖寵)을 가득히 받으신 성모마리아여, 천주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나니.)

*나는 나의 군생활 일기장을 CD에 1999.3.24.日字로 입력을 완료 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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