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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군사반란 주도 軍內私組織 하나회 2

정치젊은유월 (younglions)
211.*.2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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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2.25 11:50


제2절 하나회의 결성과 확대

(1) 하나회의 결성

1963년 하나회 결성작업은 철저한 보안 속에서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인선작업은
전두환, 노태우, 권익현 등 육사 11기가 주축이 되고 13, 14기 후배들이
뒷받침했다. 선발기준은 한수(漢水) 이남 출신으로서 충성심이 강하고 의리가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각 기당 10명 내지 12명으로 정했다. 조직의 명칭은 '태양을
위하고 조국을 위하는 하나같은 마음'이라는 뜻에서 '하나회'(일명 一心會)라고
정했다. 하나회는 초기에 김태환회(金泰煥會)라고도 불렸는데, 이 이름은
김복동, 노태우, 전두환의 이름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온 것이라고 한다.
하나회의 회장은 전두환이 맡았다. 김복동은 전두환과 하나회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다가 패하여 이후 하나회에서 멀어졌다. 조직의 결성방식은 육사 11기 텐
멤버를 본따 각 기별로 텐 멤버를 조직하고 이를 종적으로 통합하여 총100여명을
망라한 단일조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당시 군부 내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육사 8기생들의 힘을 견제하고 박정희의 지지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경상도 출신을 70-80%나 선발한 반면 이북 출신은 배제하였다.

하나회는 단순한 친목단체에 불과했던 것이 아니라 엄격한 규율과 보안을
강조하는 비밀조직이었다. 입회시에는 반드시 엄격한 자격심사와 복잡한
가입절차를 거쳐야 했다. 육사 11기에서 먼저 각 기별로 최초의 회원 한 명을
선정해서 만장일치로 가입결정을 내리면, 다음부터는 이 한 명을 중심으로
동기생들끼리 텐 멤버를 구성했는데, 이 경우 신입회원은 11기 선배들뿐만
아니라 동기들로부터도 만장일치의 동의를 얻어야만 가입될 수 있었고, 만약 한
명이라도 반대자가 있으면 가입될 수 없었다. 가입대상자로 일단 물망에 오른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격, 가족관계, 교우관계, 졸업성적, 건강상태,
사생활 등에 관해 철저한 뒷조사를 받게 되는데, 이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면
가입권유를 받을 수 있었다. 가입권유를 받은 사람은 이를 '최대의 영예'로
생각하고 흔쾌히 받아들였으며, 거절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입회식에서는
목숨을 걸고 조직의 비밀을 지키며 명령에 절대 복종할 것을 서약했다. 하나회
회원의 한 사람은 입회식 당시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약속한 시간에 11기 선배의 어느 집에 가면 11기 전체 회원이 마루나 다다미방
같은 곳에서 일렬로 앉아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에는 회장(전두환)이 앉아
있지요. 반드시 혼자 가서 무릎을 꿇고는 '국가와 조직에 충성한다'는 내용의
선서를 합니다. 선서가 끝나면 11기 중의 한 명이 붉은 포도주를 한 잔 따라
줍니다. 두 손으로 그 잔을 받아 마시면 그걸로 하나회 회원이 되는 겁니다."

하나회는 이러한 방법으로 비밀리에 조직원을 모집하여 <표 3-1>과 같이 육사
11기에서 20기까지 총120여명에 이르는 회원을 확보하였다.

<예 3-1> 하나회 회원 명단 (육사 11-20기)

육사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정호용(鄭鎬溶), 김복동(金復東),

11기 권익현(權翊鉉), 최성택(崔性澤), 백운택(白雲澤), 손영길(孫永吉),
안교덕(安敎德), 노정기(盧正基), 박갑룡(朴甲龍), 남중수(南仲守)

박준병(朴俊炳), 박희도(朴熙道), 박세직(朴世直), 안필준(安弼濬),

12기 정동철(鄭東喆), 장기오(張基梧), 황인수(黃仁秀), 최 웅(崔 雄),

김홍진, 이광근, 임인식

최세창(崔世昌), 오한구(吳漢九), 정동호(鄭東鎬), 신재기(辛再基),

13기 윤태균(尹泰均), 이우재(李祐在), 황진기(黃鎭祺), 조명기(趙明紀),
최문규(崔文奎), 우경윤(禹慶允), 권영휘(權榮暉), 박종남(朴鍾南),

정진태(鄭鎭泰)

이종구(李鍾九), 이춘구(李春九), 안무혁(安武赫), 배명국(裵命國),

14기 정도영(鄭棹永), 박정기(朴正基), 장기하(張基夏), 신우식(申佑湜),
장홍열(張洪烈), 이철희(李哲熙), 이경종(李暻鍾), 신쌍호, 문영일,

최종국, 김충욱

이진삼(李鎭三), 민병돈(閔丙敦), 고명승(高明昇), 김상구(金相球),
15기
이대희(李大熙), 나중배(羅重培), 권병식(權丙植), 강자화(姜資和),

이한종(李漢鍾), 이상수(李相秀), 박태진(朴泰珍), 김중영

장세동(張世東), 신말업(申末業), 정순덕(鄭順德), 최평욱(崔坪旭),
16기
송응섭(宋膺燮), 정만길(丁萬吉), 김정룡(金正龍), 이필섭(李弼燮),

양현두, 최원규, 이지윤, 김충식

김진영(金振永), 안현태(安賢泰), 허화평(許和平), 허삼수(許三守),
17기
이현우(李賢雨), 이문석(李文錫), 류근하(柳根夏), 김근준(金根俊),

임인조(林寅造), 김태섭, 이병태, 이해룡, 강명오

이학봉(李鶴捧), 구창회(具昌會), 정태화(鄭泰和), 조남풍(趙南豊),
18기
성환옥(成煥玉), 김정헌(金正憲), 김재창(金在昌), 이시용, 배대웅,

심준석, 이승남

서완수(徐完秀), 김진선(金鎭渲), 노석호(盧錫鎬), 최석림(崔錫林),
19기
장석규(張錫奎), 김상준(金相駿), 최윤식, 김택수, 김학주, 최준식,

이택형, 김정환, 최부웅, 최윤수

20기 안병호(安秉浩), 허청일(許淸一), 김무웅(金武雄), 김종배, 김길부,
이현부, 함덕선, 장호경, 안광열

(이상 122명)

(2) 자리 물리기

하나회 회원들은 이른바 '자리 물리기' 방식으로 군 요직을 두루 장악함으로써
군부의 실세로 떠올랐다. 대표적인 사례로 청와대 경비를 맡았던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 자리를 꼽을 수 있다. 이 자리는 처음에 박정희의 전속부관인
손영길(육사 11기)이 맡고 있다가 1967년 육군대학을 가게 되면서 전두환에게
넘겨 주었고, 1969년 전두환이 물러가면서 다시 박갑룡(11기)에게 넘겨 주었고,
그 후임으로 이종구(14기), 고명승(15기), 장세동(16기), 김진영(17기) 등
계속해서 자리 물리기가 되풀이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하나회 회원들이었다.
하나회 회원들의 자리 물리기 관행은 1980년대에 들어와 더욱 심해졌다. <표
3-2>와 <표 3-3>과 같이 역대 수도방위사령부 30단장과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은
대부분 하나회 출신 장교들이 차지하였다.

<예 3-2> 역대 수도방위사령부 30단장

성명 재임기간 육사 하나회

이현우 80년 1월-81년 12월 ○

김상준 81년 12월-82년 12월 17기 ○

김충석 82년 12월-84년 12월 19기 ­

길영철 84년 12월-86년 12월 23기 ○

안광찬 86년 12월-88년 12월 25기 ○

김부명 88년 12월-90년 12월 29기 ­

박항규 90년 12월-93년 5월 ○

<예 3-3> 역대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성명 재임기간 육사 하나회

박준병 81년 5월-81년 7월 ○

김응열 81년 7월-82년 1월 ­
12기
안필준 82년 1월-83년 1월 ○
12기
정동호 83년 1월-83년 12월 ○
13기
박명철 83년 12월-84년 7월 ­
15기
고명승 84년 7월-85년 5월 ○
15기
이대희 85년 5월-86년 6월 ○
16기
최평욱 86년 6월-87년 6월 ○
17기
임인조 87년 6월-87년 12월 ○
17기
이현우 87년 12월-88년 2월 ○
18기
구창회 88년 2월-89년 4월 ○
19기
장석린 89년 4월-90년 6월 ­
20기
김진선 90년 6월-90년 10월 ○
21기
안병호 90년 10월-91년 12월 ○

최승우 91년 12월-93년 4월 ○

하나회 회원들은 정치권력과 다소 거리가 있는 야전군 사령관으로 근무하기보다
정치권력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는 육군본부, 수도경비사, 공수특전단,
육군참모총장실, 대통령 경호실, 중앙정보부, 보안사 등에서 주로 근무하였다.
일선에서 근무한 경력이 필요한 경우에도 이들은 서울 근방의 1사단이나
9사단에서 단기간 복무한 뒤 곧바로 후방으로 복귀하였다.

<예 3-4> 하나회 소속 육군본부 근무자 명단

육사 이름 직위

11기 전두환 인사참모부

박준병 인사운영감, 인사참모부장
12기 인사운영감, 인사참모부장
안필준

황인수 정보참모부장

정동호 인사참모부장
13기 정보참모부장
윤태균

최문규 작전참모부장

이대희 인사운영감, 인사참모부장
15기 정책기획실장
나중배

민병돈 정보참모

16기 작전참모부장
정만길

인사참모
18기 구창회
성환옥 헌병감

19기 인사참모
김진선

20기 인사참모
안병호

이들이 가장 많이 근무한 곳은 육군본부였다. <예 3-4>와 같이 1963년 전두환이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근무한 것을 시발로, 12기의 박준병, 안필준, 황인수,
13기의 정동호, 윤태균, 최문규 등 하나회 후배들은 계속해서 육군본부에서
근무하였다. 이들은 임기를 마치면 그 후임자로 11기 선배들의 동의를 얻어
하나회 동기나 후배들을 추천하는 방식으로 자리물림을 계속하여 군부의 요직을
독차지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대부분 비슷한 군 경력을 가지게 되었다. <예
3-5>와 같이 전두환과 노태우의 군 경력은 매우 유사하다.

<예 3-5> 주요 군 경력 비교

전두환 (全斗煥) 노태우 (盧泰愚)

1955 육사 11기 졸업 1955 육사 11기 졸업

1960 미 보병학교 수료 1959 미 특수전학교 수료

1963 하나회 창립 멤버 1963 하나회 창립 멤버

1965 육군대학 졸업 1968 육군대학 졸업

1966 공수특전단 부단장 1974 공수특전 여단장

1967 수경사 30대대장 1978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6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9 수경사령관

1979 보안사령관 1980 보안사령관

1980 대장으로 예편 1981 대장으로 예편

하나회 회원들은 군과 국가에 대한 충성보다 조직에 대한 충성을 앞세웠으며,
군의 공식적 지휘나 통제보다 조직의 결정사항을 우선시하였다. 그 대가로
이들은 각종 진급과 보직에서 특별한 배려와 혜택을 받았으며, 심지어 중대한
잘못을 범한 경우에도 문책을 당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비하나회 출신의 한
대령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인사문제를 떠나더라도 하나회 출신 장교가 운영하는 부대에서 사고가 생겼을
때 처리하는 관행을 보면 특혜라는 점이 잘 드러난다. 70년대초 이종구씨가
전방부대 대대장으로 있을 때 부대에서 10여명이 사상하는 총기사고가 있었지만
책임자인 그는 무사했다. 박준병씨가 20사단장 때 훈련 중 6명이 죽었고,
최평욱씨가 사단장일 때 예하부대에서 월북사고가 일어났지만 역시 무사했다.
비하나회 출신 장교가 지휘관이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하나회에서 전두환은 특별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동기나 후배들이 진급하거나
보직을 받아 멀리 떠날 때면 반드시 기억될 만한 술자리를 벌이고 격려해
주었다. 그는 회장으로서 다른 동기생들을 친구가 아닌 부하로 대하였다.
마찬가지로 동기생들도 그를 친구가 아닌 상관으로 대하였다.

하나회 회원들은 자기들끼리는 공식적 직위나 계급을 부르지 않고 '형님' 또는
'아우'라고 불렀으며, 특별히 11기 선배들에 대해서는 '큰형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전체 장교의 1%, 정규육사 출신의 5%(매년 200명의 졸업생 중
10여명)에 불과한 이들은 형님은 아우를 끌어 주고 아우는 형님을 밀어 주는
호혜적 관계를 형성하고 회원들끼리 '자리 물리기'를 되풀이함으로써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랐다.

(3) 윤필용 사건

1970년대에 들어와 하나회 세력은 더욱 커졌다. 1973년 1월 전두환은 손영길,
김복동, 최성택과 함께 육사 11기생으로서는 처음으로 별을 달았다. 2월 초
전두환은 손영길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이 베푼 만찬에 초대받아 크라운 4기통
세단 승용차와 금일봉을 하사받았다. 뒤이어 노태우와 정호용도 준장으로
진급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들에게 '一心'(일심)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지휘봉을 하사하였다. 핵심 멤버들이 장군으로 진급함으로써 하나회는 군부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떠올랐다.

하나회 세력이 커지자 선배 장교들도 하나회를 지원하는 측과 견제하는 측으로
나누어졌다. 윤필용(尹必鏞) 수경사령관, 박종규(朴鐘圭) 경호실장,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 서종철(徐鐘喆) 국방장관, 차규헌(車圭憲) 2군사령관,
진종채(陳鍾埰) 보안사령관, 유학성(兪學聖) 3군사령관, 황영시(黃永時)
육군참모총장, 김시진(金詩珍) 헌병감 등이 이들을 지원하였다. 특히 윤필용
장군은 같은 경상도 출신의 하나회 후배들을 적극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하나회의 대부(代父)라고 불렸다. 반면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
강창성(姜昌成) 보안사령관, 정승화(鄭昇和) 장군 등은 하나회 세력을 견제하려
하였다. 이러한 세력다툼의 과정에서 1973년 '윤필용 사건'과 '보안사 휘발유
유용 사건'이 발생하였다.

1973년 4월의 '윤필용 사건'은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노쇠했으니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는 이후락(李厚洛) 형님이 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윤필용과 그를 따르던 하나회 후배들이
쿠데타를 모의한 죄로 대거 구속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손영길, 권익현,
신재기 등 장교 10명이 구속되었고, 안교덕, 정동철, 배명국, 박정기, 김상구,
정봉화 등 31명이 예편되었으며, 24명이 인사이동 그리고 160여명이
감시대상으로 분류되었다. 또한 민간인으로서 육사 11기와 가깝게 지내던
이원조(李源祚) 제일은행 차장이 해직되고, 윤필용 장군과 가깝게 지내던
김연준(金連俊) 한양대 총장 겸 대한일보 사장이 구속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로 거명되었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도 초조한 마음에 '김대중 납치
사건'을 벌였다가 해임되었다. 유신 직후의 어수선한 사회분위기에서 윤필용이
박정희에 관해 불만을 토로한 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 사건은
병력동원과 같은 구체적 거사계획을 잡은 것은 없기 때문에 쿠데타 모의라고까지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비영남파
세력이 군부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하나회를 상대로 집요한 수사를 벌임으로써
결과적으로 커다란 정치적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예 3-6> 출신지역별 하나회 회원 명단

노태우(대구), 정호용(대구), 김복동(청송), 안교덕(울진),

박세직(칠곡), 정동철(칠곡), 최세창(대구), 오한구(봉화),

윤태균(청송), 황진기(대구), 조명기(대구), 우경윤(예천),

권영휘(의령), 이종구(대구), 정도영(문경), 박정기(대구),

북 신우식(문경), 김상구(상주), 이대희(예천), 권병식(영일),

경 송응섭(대구), 김정룡(문경), 허화평(포항), 이현우(대구),

상 성환옥(영천), 김정헌(대구), 김재창(대구), 서완수(대구),

도 노석호(대구), 허청일(경산)

전두환(합천), 권익현(산청), 최성택(부산), 손영길(울산),

박희도(창녕), 황인수(사천), 정동호(의령), 신재기(창녕),

배명국(진해), 신말업(울주), 정순덕(충무), 최평욱(남해),

김진영(충무), 허삼수(부산), 이학봉(부산), 구창회(진주),

조남풍(부산), 안병호(진주)

노정기, 장기오, 최웅, 이우재, 이철희, 민병돈, 정만길,
서 울
이문석, 장석규

박준병(충북 옥천), 안필준(충북 중원), 최문규(대전),

충청도 정진태(충남 예산), 이춘구(충북 청원), 이진삼(충남 부여),

나중배(충남 예산), 김진선(충북 괴산)

전라도 박종남(전남 목포), 고명승(전북 부안), 장세동(전남 고흥)

강원도 장홍열(강원 명주)

이 북 안무혁(황해 안악)

같은 해 8월 이른바 '보안사 휘발유 유용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해임되고, 김귀준 참모장, 김진백 군수참모, 김영환
군수과장, 이동주 소령 등이 구속되었다. 또한 하나회 조사담당이었던 김종진
보안처장과 이대호, 박영선 비서실장 등 20여명의 장교가 예편되었다. 박종규
경호실장도 얼마 후 해임되었다. 이 사건은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영남파 세력이
강창성에게 가한 일종의 반격작전이었다. <표 3-6>과 같이 하나회 회원의
70%가량이 경상도 출신이었다. 이들은 하나회에 대한 1단계 수사에 이어 2단계
수사가 시작되려 하자 위협을 느끼고 "강창성이 경상도 출신 장교들의 씨를
말리려 한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또한 진종채 수경사령관은 경상도 장군을
대표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강창성 보안사령관의 교체를 강력히 건의했다.

결국 이 두 사건을 통해 영남파의 보스(boss)였던 윤필용과 이들을 견제하려
했던 비영남파의 강창성이 모두 타격을 입고 예편함으로써 양자의 싸움은 승자
없는 싸움으로 끝나고 말았다.

1973년의 두 사건은 박정희와 전두환 모두에게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안겨
주었다.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하여 장기집권을 꾀하던 박정희는 군부 내
실력자인 윤필용과 강창성을 동시에 제거함으로써 쿠데타 가능성을 없애고
권력기반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또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박종규 경호실장을
제거함으로써 중간보스들의 전횡을 막고 친정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전두환도 이 사건을 계기로 하나회의 주도권을 확고히 잡고 권력의
정점을 향해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가 하나회 회장이면서도 이
사건에 연루되지 않고 수사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었던 것은 윤필용의 약점과
비리에 관해 박정희에게 직접 중요한 제보를 했고, 또한 박종규 경호실장의 특별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라이벌인 손영길이 구속됨으로써
전두환은 하나회와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의 보스로서 확고부동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중간보스들이 제거된 권력의 빈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피라미드 조직의 정상을 향해 바짝 다가갈 수 있었다. 많은 수의 하나회
회원들이 구속 또는 예편당하는 위기를 겪었지만, 핵심 멤버인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이 이 사건에 연루되지 않음으로써 하나회는 그 명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하나회는 이미 윤필용 장군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자립적인
조직으로 성장해 있었다.

(4) 권력 피라미드의 구조 변화

1970년대 중반 이후 박정희와 전두환의 호혜적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박정희는 육사 8기의 윤필용, 강창성 등에 비해 나이도 어리고 세력도 크지 않아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은 육사 11기 장교들을 총애하고 적극
후원하였다. 전두환은 선배 장교들에 대항해 자신의 세력을 보호하고 지원해 줄
강력한 후견세력으로서 박정희를 필요로 하였다. 양자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공생관계로 결합되었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관계는 단순한 직책상의 상하관계 이상이었다. 이들은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처럼 친밀했는데, 심지어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자(養子)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1961년 5.16 직후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전두환과 하나회 장교들은 박정희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쳤고, 그 대가로
박정희는 전두환과 하나회 장교들에게 진급과 보직상의 특혜를 베풀었다.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중간보스들이 몰락함으로써 박정희와 전두환의 정치적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그림 3-3>과 같이 "박정희-윤필용-전두환"으로
이어지던 권력 피라미드 구조는 이 사건 이후 "박정희-차지철-전두환"의 구조로
변화되었다. 전두환은 이전까지 자신을 보호하고 후원해 주던 윤필용이 제거되자
새로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임명된 차지철(車智澈)을 통해 보호와 후원을 받게
되었다.

1976년 전두환은 차지철의 추천으로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근무하게
되었다. 전두환과 차지철은 서로 밀고 당겨 주는 호혜적 관계로 결합되었다.
전두환은 차지철을 통해 각종 진급과 보직에서 특혜를 받을 수 있었고, 차지철은
전두환을 통해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장악, 통제할 수 있었다. 전두환은
차지철을 만나 인사청탁을 자주 했는데, 동생 전경환(全敬煥)이 경호처
경호관으로 발탁된 것도 전두환의 인사청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차지철에게 "제 동생 경환이가 내근 부서인 정보처에 있는데, 충성심이 강하고
유도도 잘 하니 경호원을 시키면 잘 할 겁니다. 선처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차지철은 각종 인사청탁을 들어 주는 대가로 전두환을 통해
하나회 인맥과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통제하려 하였다.

"차실장은 하나회 회장이었던 전두환 작전차장보가 동기나 군 후배들을 소개하면
이들을 격려하는 것을 즐겼어요. 주로 별을 달고 야전지휘관으로 나가는
후배들이 인사차 경호실로 전씨를 찾아오면, 전씨는 이들을 실장방으로 데리고
가 소개시켰죠. 차실장은 이들에게 금일봉과 함께 '경호실 증정'이라고 새겨진
지휘봉을 주곤 했는데, 군 후배들은 이를 더없는 영광으로 여겼죠."

1960년대-70년대 초 윤필용이 하나회 후배들을 후원해 준 것처럼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차지철이 하나회 인맥을 이끌어 주고 지원하였다. 마찬가지로 전두환은
윤필용에게 바치던 충성과 지지를 차지철에게 바쳤다.

그러나 1970년대말에 들어와 차지철과 전두환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차지철이 권력의 2인자로서 부통령 행세를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차지철을 견제하기 위해 전두환을 지지, 지원하였다. 하나회
세력이 커지자 차지철도 전두환 그룹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차지철과 전두환의
관계는 협조관계에서 경쟁관계로 변화되었다. 전두환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있을 때 내가 계속 나가겠다고 했어요. 차지철과 내가
사이가 나빴어... 차지철이가 여러 가지 일을 비뚤어지게 해. 중령으로 예편하고
국회의원을 한 사람인데, 경호실장 하면서 꼭 국회의원을 상대하고 높은 장군을
경호실에다 데려다 놓아. 차지철이가 나한테 경호실장 자리 뺏길까 봐 굉장히
신경쓰는 것 같애. 내가 내보내 달라고 했어."

결국 전두환은 1978년 대통령 경호실을 떠나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경호실
작전차장보 자리를 떠나면서 자신의 후임으로 노태우를 추천했다.

1979년 3월 전두환은 박정희의 특별 배려로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그는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과 함께 박정희를 둘러싼 핵심 측근 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전두환의 부상과 함께 그가 키워온 사조직 하나회의 세력도 커졌다. 육군본부
특명검열단에 있던 허화평(許和平) 대령이 보안사 비서실장에, 허삼수(許三守)
수도군단 보안부대장이 인사처장에 임명되는 등 많은 하나회 후배들이 보안사로
진출하여 요직을 차지하였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이 됨으로써 차지철의 후원을 받는 수혜자의 처지에서
벗어나 경쟁자의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전두환 중심의 하나회 세력은
1960년대에는 당대의 세도가 윤필용 수경사령관의 도움을 받아, 그리고
1970년대에는 권력의 2인자 차지철 경호실장의 후원을 받아 성장하였다. 이
세력은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2인자 그룹이 제거되자 박정희와 더 가까와진
것과 마찬가지로, 1970년대말에는 차지철의 후원을 받지 않고도 직접 박정희와
호혜적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1960-70년대의 기간 동안 전두환과 하나회는 권력 피라미드의 구조 변화가 있을
때마다 한 걸음씩 권력의 최정상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제1절 1979-80년 신군부의 등장

(1) 10.26과 합동수사본부
(2) 12.12와 군부의 세대교체
(3) 5.18과 국보위


(1) 10.26과 합동수사본부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 17년의 역사가 끝나고 새로운 정치정세가 조성되었다.
전두환(全斗煥)과 하나회는 그 어느 정치세력들보다도 신속히 이 사건에
대처함으로써 이후의 정치국면을 주도해 나갈 수 있었다.

10.26사건 직전에 박정희 대통령 주변에는 2인자들간에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권력다툼은 2인자들끼리 서로 견제시키고 충성경쟁을
벌이게 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안정시키려 했던 박정희식 용인술(用人術)의
결과였다. 2인자들 중에서도 특히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세력이 강했는데, 10.26 직전에는 차지철의 세력이 더 강한
상태였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이라는 공식 직책에도 불구하고 차지철의 견제를
받아 3월부터 10월까지 단 한 차례도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모든 정보채널은 차지철에 의해 사전에 파악되고 차단되었다.

10월말 전두환은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 등 박정희 주변 2인자들간의 역학관계를 분석하고, 이들을 제거할 것을
주장하는 중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는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권력다툼이 극도에 달해 자칫 대통령이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특별 면담을 신청하였다. 그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사실은 10월 26일 돌아가셨지만 10월 27일에 내가 보안사령관으로서 보고를
하도록 돼 있었어. 내가 보안사에 가서 권력주변을 보니 박 대통령 주변이
형편이 없어. 김재규, 차지철, 정당관계 암투가 있어 박 대통령이 상당히 위험할
것 같았어. 두툼한 보고서를 만들었어... 보안사에서도 진종채 사령관이 가면서
나한테 보고서를 내지 말라고 했어요. 내면 죽는다고 하면서. '그러면 누가 박
대통령을 깨우쳐 주느냐' 내가 노재현 국방장관에게도 얘기했어. 비서실 내부도
엉망이고 우군 싸움이 김일성이와의 싸움보다 더 심해. 망하려니 그런가 봐.
그래서 내가 10월에 들어가서 최광수 의전수석을 보고 10월 27일쯤 보고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어. 몇 번이나 읽어 보고 연습도 하고 보고준비를 다 했었는데
박 대통령이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결국은 이렇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했어."

사건 당시 청와대 경호실, 중앙정보부, 대통령 비서실 등 주요 권력기관에서는
사건의 정확한 진상을 몰라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 노재현(盧載鉉) 국방장관,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
이어지는 군 지휘계통에서는 신속히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전두환은 10.26사건을 마치 예견이나 한듯이 신속한 대응을 취하였다. 그는 밤
11시경 국방부 보안사 부대장실에서 김재규 체포 및 호송 작전에 참여하였고,
새벽 2시경 33헌병대를 보안사 직속부대로 배속받아 궁정동 안가로 진입,
경비원들을 무장해제시키고 현장을 접수하였다. 27일 오전 계엄공고 제5호에
따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국내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통제할 수 있는
합동수사본부(약칭 합수본부)를 설치하고 그 장(長)이 되었다. 이로써 그는
권력의 공백기에 모든 정보를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군부와 민간인에 대한 일체의
수사지휘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아침 8시 30분 그는 보안사 회의실에 각
수사정보기관의 책임자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보안사가 박정희 대통령
살해사건의 수사 책임을 맡게 되었음을 통고하고 중앙정보부의 권한과 기능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매일 오전 8시와 오후 5시 두 차례에 걸쳐 수집된 모든
정보를 합수본부에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이 모든 것이 사건 발생 13시간만에
취해진 조치들로서, 너무나 완벽한 대응이었다.

10.26 직후의 합수본부는 단순한 수사전담기관이 아니라 하나의 권력기관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림 4-1>과 같이 합수본부는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 보안사,
군검찰, 헌병 등 국내의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장악하고, 3실 3처 1단의
조직구성에 약 5백명의 요원을 망라한 방대한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출신
기관별로 살펴 보면 <표 4-1>과 같이 보안사 출신이 379명으로서 76%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합수본부는 보안사가 다른 수사정보기관들을
장악하기 위해 만들어 낸 임시기구에 불과했다. 합수본부의 권한이 커지자 경찰,
행정관료, 정치인, 기업인, 군 장성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합수본부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합수본부 비서실로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보를 얻으려고 기웃거리는
장교들이 모여들기도 했습니다. 관료들도 합수본부의 통제를 자청해 와서 우리는
본의 아니게 행정적인 일이나 정치적인 일에 간여하게 되었습니다. 경찰도
합수본부에 예속을 자원해 오고 있었습니다. 자석에 빨려들듯이 합수본부로
저절로 힘이 쏠리고 있었습니다."

합수본부의 권한이 커지자 미국측에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특별히 주목하기
시작했다. 미 정보기관에서는 한국의 차기 정권을 담당할 사람으로서
최규하(崔圭夏) 국무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수본부장의 세 사람을 꼽고, 최규하는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가, 정승화는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이, 전두환은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이 각각 맡아 빈번히 접촉하였다.

미국측이 평가하기에 최규하가 헌법상에 부여된 권한을 행사하여 실질적인
정치지도자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군부를 자기 편으로 돌려야 하는데, 그는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는 인물로 보였다. 정승화는 계엄령하에서 3권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는 했지만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그 위에
얹혀 있는 것으로 비쳤다. 반면 전두환은 보안사, 중앙정보부, 경찰, 검찰 등
수사정보기관을 완전 장악하고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전두환은 하나회라는 사조직과 함께 합수본부라는 공조직까지 모두 장악함으로써
10.26 이후 권력의 공백 상황에서 누구보다도 유리한 위치에서 권력재편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예 4-2> 10.26 이후 주요 사건 일지

79-80년 주 요 사 건

10. 26 박정희 대통령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사망

12. 12 전두환 보안사령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

12. 21 최규하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

4. 14 전두환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겸임 발령

4. 21 강원도 사북탄광 노동자 파업

5. 15 전국 대학생 연일 대규모 시위

5. 17 비상계엄 전국으로 확대

5. 18 광주민주화운동

5. 27 계엄군 광주시위 유혈진압 (사망자 174명 발표)

5. 31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발족 (상임위원장 전두환)

6. 1 중앙정보부 요원 300명 숙정

6. 24 김종필 모든 공직 사퇴

7. 10 고급 공무원 243명 숙정

7. 15 일반 공무원 4,760명 숙정

7. 19 전직 장관 및 국회의원 17명 연행

7. 31 정기간행물 172개 등록취소

8. 13 김영삼 정계은퇴

9. 1 전두환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

9. 17 김대중 사형선고

10. 22 제5공화국 헌법 국민투표 실시

10. 27 국가보위입법회의 발족

11. 12 정치활동규제자 811명 발표

11. 14 언론기관 통폐합

12. 1 민주한국당 창당발기인대회

12. 2 민주정의당 창당발기인대회

12. 6 한국국민당 창당발기인대회

(2) 12.12와 군부의 세대교체

10.26 이후 한국정치의 진로는 세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재야와 야당이 연합하여 정권을 잡는 경우이고, 둘째는
민간부문과 군부의 힘이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최규하 권한대행이 대통령직을
계속 맡아 수행하는 경우이며, 세째는 군부의 강경파가 무력을 사용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경우이다.

향후 정치진로와 관련하여 군부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과 노재현 국방장관 등 군 수뇌부는 최규하 권한대행을 대통령으로
옹립하고 군부와 민간부문의 힘이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점진적인 민주화를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소장군부는
군이 정치에 적극 개입하여 구악(舊惡)을 일소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창출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양자간의 의견대립이 심각한 단계에
이른 12월 초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군부는 무력을 동원하여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하는 12.12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로써 10.26 이후 한국정치의
진로는 민간정부의 출범이 아니라 군부정권 연장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2.12사건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잡기 위한 일종의 파당적 쿠데타에 해당한다. 이
사건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회 장교들과 그 영향력 아래에 있는
정규육사 출신 소장군부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무력을 동원하여 정승화
계엄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등 상급 장교들을 체포, 연행하고 군의
주도권을 잡은 하극상(下剋上) 사건이다. 1961년 박정희의 5.16쿠데타와
마찬가지로 이 사건도 군부 내 상층과 중하층의 단절과 대립이 심화된 상황에서
발생했다. 당시 상황에 관해 주한미군의 한 정보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우리는 정규육사 출신 장교단과 선배 육사 출신 사이에는 단층선(fault line)이
있다고 보았다. 군부에 이런 단층선이 있을 때 외부적 환경이 조성되면 변란이
생길 수 있는데 (1961년의: 인용자 주) 5.16쿠데타가 그런 경우였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단층선 위에 있는 비정규육사 출신의 상층부만 통제할 뿐, 단층선
아래에 있는 정규육사 장교단이라는 중추부를 컨트롤(control)하지 못하고 있어
불안전한 상태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부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군의 세대교체작업은 정승화와
김재규 인맥을 제거하고 전두환 중심의 하나회 인맥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 작업은 전두환, 노태우,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김윤호
장군으로 구성된 '6인 군사위원회'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작업으로 12월 19일
구세대에 속하는 약 40여명의 장성들이 강제 퇴역당했다. 반면 12.12에 적극
참여했던 유학성 국방차관보는 3군사령관으로, 황영시 1군단장은 참모차장으로,
차규헌 수도군단장은 육사교장으로, 노태우 9사단장은 수도경비사령관으로,
김윤호 교육사령부 부사령관은 1군단장으로, 백운택 방위사단장은 9사단장으로,
정호용 향토사단장은 특전사령관으로 각각 승진하였다.

군과 같은 위계적 조직에서 12.12와 같은 하극상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회와 같은 비밀사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군부 내에 단층선이
형성되어 상층과 중하층의 단절과 대립이 심화되어 있었다고 할지라도 하나회와
같이 군의 공식적 지휘계통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비밀결사조직이 없었다면 쿠데타는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나회 소속
장교들과 이들의 영향을 받은 많은 수의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이 육군본부의
진압명령에 따르지 않고 전두환의 신군부측을 지지하거나 최소한 중립을
지킴으로써 12.12쿠데타는 성공할 수 있었다.

당시 상황에 관해 미 8군의 한 정보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비정규육사 출신 장성들이 육본을 지지하려고 해도 정규육사 출신 대령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정규육사 출신들은 상층부의 비정규육사 출신들 때문에
진급이 늦어지고 있는데 대해서 불만이 쌓여 있었고, 능력이 떨어지는 그들
밑에서 수모를 당해 왔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의 엘리트 의식과 선배 장교들에 대한 불만이라는 공통된
요구에 기반하여 1963년 결성된 하나회는, 16년이 지난 1979년 마찬가지
이유에서 12.12쿠데타를 일으키는 데 주역을 담당했다.

<그림 4-2>와 <예 4-3>과 같이 12.12 당시 병력을 동원한 많은 수의 장교들은
1963년 결성되어 박정희 대통령의 후원을 받으며 비밀리에 성장해 온 하나회
조직의 회원들이었다.

<예 4-3> 12.12사건 참가자 명단

성 명 직 책 계급 육사 하나회
전두환 보안사령관 ○
소장 11기
정도영 보안사 보안처장 ○
준장 14기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 ­
대령 15기
허화평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
대령 17기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 ○
중령 17기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 ○
준장 18기
우국일 보안사 참모장 ­
차규헌 수도군단장 ­
중장 8기
황영시 1군단장 ­
중장 10기
노태우 9사단장 ○
소장 11기
정호용 50사단장 ○
소장 11기
백운택 71방위사단장 ○
준장 11기
박준병 20사단장 ○
소장 12기
박희도 1공수여단장 ○
준장 12기
장기오 5공수여단장 ○
준장 12기
최세창 3공수여단장 ○
준장 13기
송응섭 9연대장 ○
대령 16기
이필섭 9사단 29연대장 ○
대령 16기
구창회 9사단 참모장 ○
대령 18기
안병호 29연대 ○
준장 20기
이상규 2기갑여단장
­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중장 8기 ­

정동호 청와대 경호실장 대리 준장 13기 ○

고명승 청와대 경호실 작전과장 대령 15기 ○

우경윤 육본 범죄수사단장 대령 13기 ○

성환옥 육본 헌병감실 기획과장 대령 ○
18기
이종민 육본 헌병대장 중령 ­

박희모 수경사 30사단장 ­

장세동 수경사 30경비단장 소장 ○
대령
16기
김진영 수경사 33경비단장 ○
대령
17기
김진선 수경사 33경비단 ○
중령
19기
최석립 수경사 33헌병대장 ­
대령
21기
조 홍 수경사 헌병단장 ­
중령
신윤희 수경사 헌병부단장 ○

위의 예와 같이 12.12사건에 참가한 것으로 밝혀진 34명의 장교들 중 하나회
소속은 24명으로서 약 70%에 해당한다. 게다가 차규헌(車圭憲), 유학성(兪學聖),
황영시(黃永時) 등은 하나회 회원은 아니었지만 예전부터 꾸준히 하나회를
후원해 온 장군들이었다. 이들은 보안사와 서울 근교의 9사단, 20사단, 71사단,
공수부대, 그리고 청와대, 수경사, 육군본부, 국방부 등 군부의 요소요소에
포진해 있다가 12월 12일 밤 전두환의 연락을 받고 쿠데타에 가담하였다.

이 날 진압에 앞장섰던 장태완(張泰玩) 수도경비사령관은 하나회 인맥이 반란을
주도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전군에 출동준비를 지시했다. 정병주(鄭柄宙)
특전사령관, 윤성민(尹誠敏) 육군참모차장, 이건영(李建榮) 3군사령관 등도
초기에는 강제 진압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모두 정규육사 출신이 아니며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신임을 받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중하층 병력을 장악하고
있는 지휘관들 중 대다수가 정규육사 출신으로서 하나회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쿠데타 군의 서울 진입을 막아야 할
수도경비사령부 안에도 장세동(張世東), 김진영(金振永), 김진선(金鎭渲) 등
하나회 소속 장교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 결과 이들의 진압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12.12사건을 계기로 하나회 인맥은 군의 주도권을 완전 장악하고 군부의
세대교체를 이루어 내었다. 1980년 이후 이들은 승진을 거듭하여 <예 4-4>와
같이 대장 18명, 중장 20명, 소장 13명, 준장 9명 등을 배출하였다.

<예 4-4> 최종 계급별 하나회 회원 명단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박희도, 박준병, 안필준, 최세창,

대 장 정진태, 이종구, 이진삼, 고명승, 나중배, 송응섭, 신말업,

김진영, 이문석, 구창회, 이필섭

김복동, 최성택, 장기오, 황인수, 정동호, 윤태균, 최문규,

중 장 이대희, 권병식, 민병돈, 장세동, 최평욱, 정만길, 김태섭,

조남풍, 김정헌, 김재창, 서완수, 김진선, 안병호

노정기, 박세직, 조명기, 권영휘, 정도영, 신우식, 장기하,
소 장
김정룡, 이현우, 최윤식, 최석림, 장석규, 김무웅

손영길, 이우재, 안무혁, 이춘구, 정순덕, 허화평, 허삼수,
준 장
이학봉, 성환옥

대 령 권익현, 안교덕, 정동철, 신재기, 황진기, 오한구, 우경윤,

이 하 박종남, 허청일, 박정기, 배명국, 노석호, 정봉화


(3) 5.18과 국보위

1980년의 봄은 민주화 열기가 분출되던 시기였다. 야당과 재야, 노동자, 학생
등은 계엄철폐를 요구하며 연일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4월 21일에는 강원도
사북탄광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고, 5월 15일에는 서울역 광장에 10만여명이
모이는 등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대해
신군부는 무력을 사용하여 강경진압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5월 18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광주시내에 계엄군을 투입하였다. 이로써 정국은 군부와
반대세력간의 정면대결의 양상으로 치달았다.

신군부의 정국대응은 두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기존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을 연행하거나 그 활동을 제한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날로
격화되는 계엄철폐 시위를 무력을 동원하여 억누르는 것이었다. 신군부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양보책을 쓸 수도 있었지만, 일단
무력으로 제압한 이후에 점진적인 유화책을 쓰기로 하였다.

5월 18일 계엄사령부는 김대중(정치인), 김종필(공화당 총재),
이후락(국회의원), 박종규(국회의원), 문익환(목사), 김동길(연세대 부총장),
이영희(한양대 교수) 등 26명을 부정축재 및 사회혼란조성 혐의로 연행하고,
24일 대통령살해사건과 관련해 사형이 확정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박선호
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등 5명에 대한 교수형을 집행하였다.

5월 27일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계엄군을 투입하였고, 이
과정에서 2,000여명의 민간인이 희생되는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계엄확대조치에
동원된 군 병력은 공수특전단, 20사단, 해병사단 등 2만 5천여명이었는데,
광주에 투입된 부대는 공수 7여단의 33대대와 35대대였다. 공수특전단은 1971년
전두환이 제1공수특전단장으로 근무한 이래, 1974년 노태우가
공수특전여단장으로, 같은 해 정호용이 공수여단장으로, 그리고 1977년부터
최세창(崔世昌)이 공수특전여단장으로 근무한 곳으로서, 하나회 회원들끼리 자리
물리기를 해 오던 대표적인 부대였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는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를 발족시켰다. 국보위는 명목상 최규하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고 있었지만, 실질적 권한은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으로
있는 상임위원회에 있었다. 국보위원의 인선작업은 보안사의 권정달(權正達)
정보처장, 허화평(許和平) 비서실장, 허삼수(許三守) 인사처장, 이학봉(李鶴捧)
대공처장 등에 의해 보안사 안가에서 은밀히 이루어졌다. 국보위는 당연직과
임명직을 포함하여 총14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상임위원급 이상 52명 중에서 군
출신이 30명으로 57%를 차지하였다.

<예 4-5> 하나회 출신 국보위원

성 명 직 책 육사 이후 주요 경력
전두환 상임위원장 11기 제11, 12대 대통령

노태우 상임위원 11기 내무장관, 민정당대표위원, 대통령

정호용 상임위원 11기 육군참모총장, 국방장관, 국회의원

이춘구 사회정화위원 14기 국회의원, 내무장관, 민정당사무총장

안무혁 건설위원 14기 국세청장, 안기부장

민병돈 내무위원 15기 특전사령관, 육사교장

최평욱 운영위원 16기 보안사령관, 철도청장

허삼수 사회정화위원 17기 대통령사정수석비서관

서완수 사회정화위원 19기 특전사령관, 기무사령관

<예 4-5>에 나타난 바와 같이 하나회 출신 인사들은 국보위에 들어가 적극
활동하였다. 상임위원회에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의 세 사람이 참여하였다.
국보위 각 분과 중에서도 특히 많은 역할을 했던 사회정화위원회에는
이춘구(李春九), 허삼수(許三守), 서완수(徐完秀) 등이 참여하였다. 국보위에
참여했던 각계 인사들은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장관, 국회의원, 청와대 등
요직으로 진출했다.

국보위는 "부정부패, 부조리 및 각종 사회악을 일소하여 국가기강을 확립한다"는
취지 아래 대대적인 숙정작업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2급 이상 공무원의 12.1%인
243명, 일반 공무원 4,760명, 국영기업체 임원의 23%인 176명이 숙정되었다. 6월
4일부터 7월 31일까지 2개월에 걸친 정화작업으로 입법부 11명, 사법부 61명,
행정부 5,418명 등 공직자 5,490명과 국영기업체, 금융기관 및 정부산하단체 등
127개 기관 임직원 3,111명 등 총 8,601명이 공직 또는 관련직에서 물러났다.
또한 7월 19일 전직 장관 및 국회의원 17명이 연행되었고, 7월 31일 정기간행물
172개의 등록이 취소되었다. 신군부 세력은 이른바 '3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6월 24일 김종필을 모든 공직에서 사퇴시키고, 8월 13일 김영삼을
정계은퇴시켰으며, 9월 17일 김대중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와 함께 11월
12일 구세대 정치인 811명을 정치활동규제자로 선정하여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국보위 산하 사회정화위원회는 8월 4일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를 단행하고,
11월 27일까지 4개월에 걸쳐 폭력배, 공갈사기배, 밀수마약사범 등
사회풍토문란자 총 5만 7,561명을 검거하고, 이들 중 66%에 해당하는 3만
8,259명을 군부대순화교육 대상자로 분류하여 이른바 삼청교육(三淸敎育)을 받게
하였다. 삼청교육 대상자 중에는 정치인, 재야인사, 광주시위 관련자, 대학생,
종교인 등 시국사범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신군부 세력의 주도로 진행된 공직자 숙정 및 사회정화운동은 구시대 정치세력을
청산하고 새로운 정치인맥을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이 숙정작업으로 신군부
세력에 대해 비우호적이었던 많은 수의 민간정치인들이 정치무대에서 사라졌다.
또한 하나회와 대립관계에 있던 비육사 출신 장교들이 대거 강제 예편당했다.
심지어 1973년 윤필용 사건의 수사책임을 맡아 하나회 소속 장교들을 구속했던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은 7월 21일 계엄군에게 연행되어 2년 6개월간 복역하면서
가혹한 삼청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반면 하나회의 대부로 알려진 윤필용 전 수경사령관은 1980년 도로공사사장을
맡는 등 후배들로부터 과거의 은혜에 대한 보답을 받았다. 또한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강제 예편당했던 많은 수의 하나회 출신 인사들이 새롭게 정계와
국영기업체의 요직에 등용되었다. 하나회 창립 멤버였던 권익현은 윤필용
사건으로 예편한 후 삼성정밀 전무를 지내다가, 육사 11기 친구들의 배려로 7월
26일 제2무임소 장관 보좌역에 임명되었다.

1979-80년 권력의 공백기에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 세력은 10.26, 12.12, 5.18 등
역사적 사건을 거치면서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제5공화국 창출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들이 군 상층부와 야당을 비롯한 민주화 세력 들의 완강한 반대와
저항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회와 같이 내적 결속력이
높은 비밀사조직을 통해 오랫동안 서로 밀고 당겨 주는 후견인-수혜자 관계로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2절 하나회 인맥의 각계 진출

(1) 하나회 인맥의 군부 장악
(2) 하나회 인맥의 사회 진출
(3) 전두환 중심의 동심원


(1) 하나회 인맥의 군부 장악

1980년대에 들어와 하나회 인맥은 군부와 사회 각계각층으로 진출했다. 하나회
인맥은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하나는 육군참모총장,
보안사령관, 수도방위사령관 등 군부의 상층과 요직을 하나회 인맥으로 채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대상으로 하나회의 후신인
'만나회'와 '알자회' 등을 조직하고 후원하는 것이었다.

하나회 인맥의 이른바 '자리 물리기' 관행은 제5공화국에 들어와 최고조에
달했다. <표 4-6>과 같이 역대 육군참모총장의 경우, 1983년 하나회 출신 중
처음으로 정호용이 이 자리를 맡은 이후 박희도(朴熙道), 이종구(李鍾九),
이진삼(李鎭三), 김진영(金振永) 등 하나회 출신 장교들끼리 자리 물리기를
되풀이하였다.

<예 4-6> 역대 육군참모총장

대 성 명 재 임 기 간 육 사 하나회

25 정호용 83년 12월-85년 12월 11기 ○

26 박희도 85년 12월-88년 6월 12기 ○

27 이종구 88년 6월-90년 6월 14기 ○

28 이진삼 90년 6월-91년 11월 15기 ○

29 김진영 91년 11월-93년 3월 17기 ○

이들의 자리 물리기 관행은 보안사령관, 수도방위사령관 등 핵심요직의 경우에는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예 4-7>과 같이 1980년 이후 역대 보안사령관 9명 중
전원이 하나회 출신이었다. 윤석양 사건을 계기로 보안사가 기무사로 이름을
바꾼 이후에도 기무사령관 자리에는 하나회 출신인 서완수(徐完秀)가
임명되었다. <예 4-8>과 같이 역대 수도방위사령관의 경우에도 예외없이 100%
하나회 출신 장군들이 임명되었다. 1979년 12.12사건 때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연행, 해임하고 노태우가 그 자리를 맡았으며, 80년부터
81년까지는 육사 12기의 박세직(朴世直)이 맡았다. 81년부터 수도방위사령부로
이름을 고친 후에도 최세창(崔世昌), 이종구(李鍾九), 고명승(高明昇),
권병식(權丙植), 김진영(金振永), 구창회(具昌會), 김진선(金鎭渲),
안병호(安秉浩) 등 8명의 수방사령관 전원이 하나회 출신이었다.

<예 4-7> 역대 보안사령관

대 성 명 재 임 기 간 육사 하나회
전두환 79년 2월-80년 8월 11기 ○

노태우 80년 8월-81년 7월 11기 ○

박준병 81년 7월-84년 7월 12기 ○

안필준 84년 7월-85년 6월 12기 ○

이종구 85년 6월-86년 7월 14기 ○

고명승 86년 7월-87년 12월 15기 ○

최평욱 87년 12월-88년 12월 16기 ○
기무
조남풍 88년 12월-90년 10월 18기 ○

구창회 90년 10월-91년 12월 18기 ○

서완수 91년 12월-93년 3월 19기 ○

<예 4-8> 역대 수도방위사령관

대 성 명 재 임 기 간 육사 하나회
수경 노태우 79년 월-80년 8월 11기 ○

수경 박세직 80년 8월-81년 8월 12기 ○

1 최세창 81년 8월-83년 6월 13기 ○

2 이종구 83년 6월-85년 5월 14기 ○

3 고명승 85년 5월-86년 7월 15기 ○

4 권병식 86년 7월-87년 12월 15기 ○

5 김진영 87년 12월-89년 4월 17기 ○

6 구창회 89년 4월-90년 10월 18기 ○

7 김진선 90년 10월-91년 12월 19기 ○

8 안병호 91년 12월-93년 4월 20기 ○

하나회 인맥은 군부 내에서 '만나회'와 '알자회'를 조직함으로써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만나회는 육사 21기에서 33기까지 각 기수별로 12명씩 선발하여
비밀리에 조직된 사조직이며, 알자회는 육사 34기부터 43기까지 동일한 방식으로
조직된 사조직이다. 이 두 조직은 구성방식에서 각 기수별로 10-12명씩
선발한다는 점, 운영방식에서 철저한 비밀유지를 강조한다는 점, 그리고
자기들끼리 각종 보직을 주고받는 등 자리 물리기 관행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하나회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강창성은 이 두 조직이 하나회의
후신으로서, 이름만 달리 한 조직이라고 보았다.

<예 4-9>는 육사 20기에서 36기까지, <예 4-10>은 육사 21기에서 26기까지
하나회(엄밀히 말해 만나회) 회원의 명단이다.

<예 4-9> 육사 20-36기 하나회 회원 명단

20기 김중배, 김길부, 김무웅, 안광열, 허정일, 장호경, 이현부

21기 이중석, 최승우, 표순배, 이명인, 전영진, 강창남, 신윤희

22기 최기홍, 유효일, 유회국, 신양호, 오형근, 박범무, 권기대

23기 손수태, 정정택, 박영일, 김영철, 서중일, 김현수, 오준의

24기 권중원, 민형국, 홍한수, 윤영정, 강영욱, 유보선, 채문기

안광찬, 강진하, 이상세, 이상선, 임인창, 박석조, 장세영, 권경석,
25기
진병국, 강창의

26기 이상희, 김익성, 임문택, 허용문, 오현구, 이기영, 안대환, 최홍규

27기 서삼섭, 제정관, 김부영, 김준섭, 한광문, 김용석, 신용순, 이해호

김진황, 안병용, 임종국, 김명길, 김선홍, 박홍열, 이채인, 이영우,
28기
권영욱

박항규, 이명구, 최득묵, 홍원기, 한동원, 강대구, 조성호, 나병태,
29기
정두진

30기 김정근, 김용기, 하형규, 조윤기, 이현중, 방정환, 권행근, 김덕곤

31기 윤희만, 이진우, 최종대, 임치규, 김용수, 한성동, 이환준

안학승, 차철이, 신경철, 최진학, 이기원, 한기엽, 이명희, 김선도,
32기
이남호, 김동화, 허 육

김경규, 김일수, 박영목, 김형원, 황인뢰, 김동화, 이중언, 민병달,
33기
박경용, 정명도, 임형민

34기 이해평, 김정국, 김홍식, 노정수, 권오성, 김형배, 이윤규, 박주현

35기 송영철, 신동혁, 정길현, 유현국, 박재두, 전중세, 이상민, 남인우

36기 김종업, 김용빈, 김종민, 김현집, 장창목, 최계명, 오 명

(백승도 대령 주장, 1993년 4월 14일)

<예 4-10> 육사 21-26기 하나회 회원 명단

육사 성 명 직 책 계 급 출신지

최승우 육본 인사참모부 소장
충남
표순배 3군사관학교장 소장
충북
강창남 대통령 경호실 (중령)
서울
21기 홍순룡 아랍에미리트 대사 (대령)
서울
이충석 합참 작전부장 소장
전북
여명현 2군 참모장 소장
강원
전영진 국방부 인사국장 소장

유효일 25사단장 소장
서울
박범무 정보본부 해외정보부 차장 준장
충북
최기홍 56사단장 소장
경북
22기 유회국 21사단장 소장
서울
신양호 국방부 지휘통제실장 소장
서울
권기대 부대 관리관 (준장)
강원
오형근 작전참모부 차장 소장

손수태 30사단장 소장 경북

정정택 수도기계화사단장 소장 경북

23기 길영철 사단장 소장 충남

박영일 사단장 소장 서울

오주의 사단장 소장 경북

민병국 육군 본부사령 준장

홍한수 육본 작전참모부 처장 준장 충북

권중원 국방부장관 보좌관 준장 경북

24기 윤영정 1군 작전처장 준장 경북

강영욱 육본 작전참모부 처장 준장 전북

유보선 한미연합사 작전처장 준장 전북

채문기 육군 범죄수사단장 준장

황진하
국방부 정책기획실 차장 준장
안광찬
합참 준장
진병국
3공수특전여단장 준장
이상선
군수본부 근무 준장
강창회
25기 국회의원 중령 충남
이상세
육본 PX복지단장 준장
장세영
기무사 준장
권경석
9공수여단장 준장
박석조
기갑여단장 준장
유수재

임문택 준장
군 사령부 참모
이상학 준장
육군참모총장 비서실장
26기 김익성 준장
육본
이기영 대령
국방부 시설국
최홍규 대령

(괄호 속의 계급은 예편자, 나머지는 1992년 기준 계급)

전두환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군 내 사조직이 이익집단으로 변질되고 장교들
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할 우려가 있다는 비판을 의식하여, 1981년 경호실장을
통해 하나회를 해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하나회는 해체되지 않았다.
6공화국 때도 노태우 대통령은 세 번이나 하나회를 해체하도록 지시했으나,
완전히 해체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해 왔다.

하나회 인맥은 한편으로 군 상층부와 요직을 장악하고 다른 한편으로 만나회,
알자회 등을 조직하는 방식으로 1980년대 한국 군부를 장악하였다.


(2) 하나회 인맥의 사회 진출

제5공화국에 들어와 하나회 출신 인사들은 사회 각계로 진출했다. 육사 11기에서
20기까지 경력이 밝혀진 88명의 하나회 회원들을 중복을 허용하여 분야별로
나누어 보면, 군부가 35명으로 가장 많고, 국회 및 정당 23명, 행정부 20명,
정부투자기관 19명, 청와대 12명, 기업체 11명, 사회단체 및 연구소 7명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징적인 것은 이들이 경제기획원, 재무부, 한국은행 등
경제분야와 사법고시를 합격해야 하는 법조계에는 한 명도 진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반면 이들은 군, 청와대, 정보기관 등 정권의 근간(根幹)을 이루는 곳에
집중적으로 포진해 있으며, 국회와 민정당에도 많이 진출했다.

<예 4-11> 하나회 인맥의 사회 진출 현황

전두환(대통령), 노태우(대통령), 장세동(경호실장, 안기부장),

안현태(경호실장), 정동호(경호실장), 이현우(경호실장), 성환

청와대 옥(경호실차장, 감사원사무총장), 안교덕(민정수석비서관), 정

순덕(정무제1수석비서관), 허화평(정무수석비서관), 허삼수(사

정수석비서관), 이학봉(민정수석비서관)

노태우(내무장관, 체육부장관), 정호용(내무장관, 국방장관),

안필준(보사부장관), 장기오(총무처장관), 정동철(노동부차관),

최세창(국방장관), 이우재(체신부장관), 이춘구(내무장관), 이
행정부
종구(국방장관), 이진삼(체육청소년부장관), 장홍렬(조달청장),

이대희(병무청장), 최평욱(철도청장, 산림청장), 박세직(체육부

장관, 안기부장, 서울시장), 안무혁(국세청장, 안기부장)

외무 노정기(주미공사, 주필리핀대사), 최웅(주폴란드대사), 나중배

대사 (주사우디대사), 박태진(주요르단대사), 김상구(주호주대사)

전두환(총재), 노태우(대표위원, 총재), 권익현(사무총장, 대표

위원), 오한구(내무위원장), 배명국(건설위원장, 상공위원장),

이춘구(사무총장, 대통령선거대책본부장), 김상구(국회교체위

원장), 정순덕(사무총장, 재무위원장), 안무혁(국회의원), 윤태
국회
균(국회의원), 정호용(국회의원), 김복동(국회의원), 박세직(국
정당
회의원), 배명국(국회의원), 이춘구(국회의원), 정동호(국회의

원), 신재기(국회의원), 허삼수(국회의원), 박준병(국회의원),

안교덕(국회의원), 이우재(국회의원), 이학봉(국회의원), 고명

승(지구당 위원장)

전두환(보안사령관), 노태우(보안사령관, 수경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육참총장), 김복동(육사교장), 박희도(특전사령

군관, 육참총장), 박준병(보안사령관), 박세직(수경사령관), 안필

준(보안사령관), 장기오(공수여단장), 황인수(육사교장), 최웅

(합참본부장), 최문규(육사교장), 최세창(합참의장), 정진태(한


미연합사부사령관), 이종구(수방사령관, 보안사령관, 육참총

장), 이진삼(육참총장), 고명승(보안사령관), 나중배(한미연합

사부사령관), 권병식(수방사령관), 민병돈(특전사령관, 육사교

장), 최평욱(보안사령관), 송응섭(합참제1차장), 신말업(참모

차장), 정만길(국방대학원장), 김진영(수방사령관,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육참총장), 이문석(특전사령관, 1군사령관), 조남풍

(보안사령관, 교육사령관), 구창회(3군사령관, 수방사령관, 보

안사령관), 성환옥(육본헌병감), 김정헌(육사교장), 김재창(합

참작전실장), 서완수(기무사령관), 김진선(수방사령관), 안병

호(수방사령관), 김무웅(한미연합사)

최성택(석유개발공사사장), 김상구(석유개발공사이사), 최문

규(석유개발공사이사장), 안교덕(농업개발공사사장), 김복동

(광업진흥공사사장), 최세창(광업진흥공사사장), 정만길(광업

정부 진흥공사사장), 안필준(석탄공사사장), 장기오(근로복지공사

투자 이사장), 정동철(한국산업안전공단이사장), 정동호(한국도로

기관 공사사장), 권병식(한국도로공사사장), 조명기(지하철공사감

사), 권영휘(창원기계공단이사장), 박정기(한국중공업사장, 한

국전력사장), 정도영(성업공사사장), 신우식(관광공사감사),

강자화(군인공제회관리이사), 허청일(기계공업진흥회회장)

손영길(동주산업회장), 안교덕(정우개발사장), 권익현(삼성정

밀전무), 정동철(호텔신라사장), 신재기(한국강업사장), 우경

기업체 윤(덕평골프장사장), 박종남(새서울종합용역대표), 박정기(한

덕생명보험회장, 정우개발사장), 장기하(진로사장), 이한종(정

우개발사장), 노석호(삼성항공부사장, 삼성중공업부사장)

김복동(국제문화연구소회장), 정동철(한국문화진흥사장), 배
사회단체
명국(지역개발연구소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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